특별기획/한국바둑 오호대장군
한국바둑 ‘오호대장군’-신진서 九단
위·촉·오 세 나라가 천하를 놓고 쟁패를 벌이던 시절. 백만 대군을 거느린 위나라는 압도적인 군사력 만큼이나 많은 장수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위나라에 비하면 모든 여건이 열악했던 촉나라는 다섯 명(관우·장비·마초·황충·조운)의 호랑이 같은 장수들이 일기당천의 위용을 떨치며 숱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들을 일컬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이라고 칭했다. 황사 바람이 몰아치는 작금의 바둑계에도 한국 바둑을 위기에서 구할 ‘오호대장군’이 있다.
변상일·김명훈(97), 이동훈(98), 신민준(99), 신진서(2000). 15위권 안 쪽에 포진된 다섯 명의 기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2년 넘게 중국 정상을 지키고 있는 커제(97)를 비롯해 삼성화재배를 정복하며 세계타이틀 홀더 반열에 오른 구쯔하오·셰얼하오(98)와 동갑내기 군단 리친청·양딩신. 자오천위·쉬자양(99), 셰커·랴오위안허(2000) 등 중국 랭킹 30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대륙의 샛별들과 태극전사들의 힘겨루기는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무술년 새해를 맞아, 본지에서는 한국바둑을 이끌 차세대 기사 다섯 명을 매월 한 명씩 만나 심층 취재해 차세대 태극 전폭기의 성능을 점검해보려 한다.
다섯 번째 주인공 신진서 九단
-2000년 3월 17일생
-2012년 입단(제1회 영재입단대회)
-2014년 제2기 합천군 초청 미래포석열전 우승
메지온배 한·중 신예바둑대항전 우승
-2015년 렛츠런파크배 우승
제3기 하찬석국수배 영재바둑대회 우승
메지온배 신인왕전 우승
-2016년 훙구탄배 한중일 삼국 바둑 정예대회 우승
제28회 TV바둑아시아선수권 준우승
이민배 세계신예바둑최강전 준우승
-2017년 제4회 글로비스배 세계바둑 U-20 우승
IMS 국제 엘리트 마인드게임스 바둑 부문 우승
크라운해태배 준우승
-2018년 제23기 GS칼텍스배 우승
JTBC 챌린지매치 4차 대회 우승
내인생의 한수
<2017 중국 갑조리그 22라운드>
○커제 九단
●신진서 八단(당시)
<2017. 10. 30. 중국. 제한시간 2시간 45분, 60초 초읽기 5회. 덤 7집반>
221수 끝, 흑 불계승
신진서 八단(당시)의 흑1·3이 커제 九단의 의표를 찌른 피니쉬블로. 불리한 가운데 힘겹게 역전을 노리던 커제 九단은 1·3을 당한 이후 흔들리다 자멸하고 만다. 7집반의 덤을 공제하는 중국 갑조리그에서 커제 九단은 무적에 가까운 백번 승률을 기록해 ‘백제(白帝)’라고 불리는 기사. 신진서의 흑1·3은 백의 제왕 커제를 무너뜨린 회심의 일격이었다.
‘오호대장군’ 끝판왕 신진서
2000년생 용띠 신진서 九단이 드디어 박정환 九단을 제치고 한국랭킹 1위에 등극했다. 비공식 세계랭킹 ‘고레이팅’에서도 세계랭킹 1위로 올라선 신진서 九단은 올해 총 대국수 100국을 돌파했다.
다승과 승률에서도 압도적인 1위다. 11월 16일 현재 79승21패로 80%에 육박하는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신진서 九단은 일찌감치 연말 바둑대상의 기록부문 ‘3관왕’을 확정지었다. 7월 28일부터 9월 25일까지 내달린 19연승으로 연승상을 확정지은 신진서 九단은 다승, 승률, 연승 등 모든 부문에서 모두 적수가 없다.
‘오호대장군’과의 상대전적도 압도적이다. 신진서 九단은 변상일 九단에게 10승1패, 이동훈 九단에게 8전 8승, 신민준 九단에게 12승3패, 김명훈 六단에게 4승2패를 기록하고 있다. 도합 34승6패, 85%의 무시무시한 승률이다.
신진서 九단이 한국랭킹과 세계랭킹에서 동시에 1위를 차지한 직후, 신 九단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박정환 九단을 제치고 한국랭킹 1위에 등극함과 동시에 비공식이지만 ‘고레이팅’ 세계랭킹에서도 1위에 올랐다. 소감은?
“개인적인 바람은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1위가 되는 것이었는데 다소 아쉽다. 올해 마지막 세계대회인 천부배가 더욱 중요해질 것 같다. 전체적으로 성적이 괜찮아져서 랭킹이 올라간 것이기 때문에 기분은 괜찮다(웃음).”
- 요즘 승리하는 대국의 기보를 보면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완승이 많다. 전체기사 다승 1위, 승률 1위를 질주하고 있는데 최근 좋아진 성적의 비결은?
“포석에서 좋아진 게 성적과 연관이 큰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이 나온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중국기사들에게 아무래도 포석에서 조금 밀리면서 불리하게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인공지능으로 공부한 이후엔 대등하게 출발할 수 있게 됐다. 그 점이 성적 향상으로 직결된 것 같다.”
- 사실 초반 포석에서 중국기사에게 밀린다는 얘기는 진작부터 있었다. 우리나라도 현재 국가대표 상비군에서 공동연구를 활발하게 하고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중국과 공동연구의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인가?
“중국의 최정상급 기사들은 나이도 어리고 대부분 비슷한 또래여서 서로 친하다. 한국은 국가대표에서 연구회를 여는 등 뭔가 하지 않으면 같이 연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중국은 꼭 국가대표 훈련이 아니더라도 대국이 끝난 이후 같이 연구하는 걸 자주 봤다. 이런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걸로 보인다.”
- 신진서 九단은 누구보다 국가대표 훈련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걸로 유명하다. 국가대표 상비군에 소속된 것이 도움이 많이 되는지?
“입단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국가대표로 훈련을 참가하고 있다. 이런 기사들이 저를 포함해서 신민준 九단 등 몇 명 있는데 국가대표 훈련 기간으로는 우리가 가장 긴 편에 속한다. 국가대표 훈련을 하면 항상 오전 10시부터 나와서 계속 공부를 해야 하므로 나태해지지 않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세계대회 시드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덕을 꽤 본 편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대표’라는 이름이 너무 가벼운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국가대표 훈련을 계속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실상 메리트가 없다. 국가대표가 아닌 기사들의 반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운 점 같지만 국가대표인 순간부터 뭔가 확실한 메리트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세계일인자가 최종 목표
- 중국기사들과의 경쟁 구도에 대한 질문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판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박정환 九단이 위에서 웬만한 중국기사들은 이기면서 잘 버텨주고 있고 김지석 九단 등 한국 최정상급 기사들이 여전히 건재하다. 중국도 천야오예 九단을 빼면 80년대생 기사들은 거의 다 밀려났다. 96년생 미위팅·판팅위 九단, 97년생 커제 九단 등에게 현재는 한국이 전반적으로 다소 밀리고 있는 양상이다. 한국도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인데 그게 아직은 잘 안 된 것 같다. 그래도 박정환 九단이 최근 기세가 좋고 저도 지금부터 더욱 잘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본다. 신민준 九단 등 동료 기사들이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같이 거둬야 될 것 같다. 일단 한국은 중국보다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세계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선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중국기사들을 이겨내야 한다.”
- 아직 과도기지만 인공지능 이후 한국기사들의 승률이 점차 올라가고 있다.
“중국기사들이 포석을 워낙 쉽고 두텁게 잘 둔다. 연구가 잘 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한국기사들도 양질의 포석을 공부할 수 있게 됐다. 이 점은 아무래도 중국보다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큰 것 같다.”
- 인공지능을 통한 바둑 공부를 위해 컴퓨터를 새로 구입했는지?
“프로그램을 돌리는 데 이상이 없을 정도의 컴퓨터를 하나 장만했다. 외국에 시합을 하러 나갈 때는 노트북을 가져가서 원격으로 컴퓨터를 활용해 포석을 연구한다. 평소에는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을 통해 복기 위주의 공부를 한다.”
- 인공지능에 의존도가 높아진 점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사실 초반 포석은 인공지능 수법들을 사실상 거의 다 외우고 있지만 굳이 안 따라두는 경우가 많다. ‘엘프고’도 못 보는 수가 많고, 추천 수에 없었는데 인간이 뒀을 때 갑자기 승리 확률이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한 수에 승률이 5% 떨어지는 정도까지는 거의 실수가 아니고 10% 이상 왔다갔다 할 때는 약간 실수일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알파고 제로가 둔 수도 5~10%까진 내려갔다 올라갔다 한다. 인공지능이 추천하는 수를 참고하며 연구하지만 자기 생각을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왜 그렇게 두는지 알아야 한다.”
- 바둑 공부를 하지 않을 때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예전보다 더 부지런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실 취미가 딱히 없다. 오히려 예전에 했던 걸 다 접고 그 시간에 공부를 한다(웃음). 바둑 외에 가장 많이 하는 건 노래를 듣는 일이다. 최근에는 ‘제이플라’라는 가수의 노래를 가장 많이 듣는다.”
- 올해 벌써 100국을 넘겼다. 체력 관리도 중요할 것 같다.
“최근 집에 런닝머신이 도착했다. 최대한 해보려고 한다.”
- 다가오는 천부배 준결승전이 12월 21일 중국에서 열린다. 장웨이제 九단과 대국하게 됐는데 승부를 어떻게 예상하나?
“장웨이제 九단은 상대를 두텁게 압박하는 바둑을 굉장히 잘 두는 기사다. 강한 상대인 만큼 전력을 다해 집중해서 둬야 할 것 같다. 전투바둑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수읽기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면서 준비할 계획이다.”
- 바둑기사로서 최종 목표는?
“인공지능 나오기 이전에 자신감이 떨어졌던 시기도 있었고 자존감이랄까 그런 게 조금 떨어졌던 때도 겪었다. 세계대회에서 중국기사에게 역전패를 당하면서 스스로에게 실망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감을 회복했고 컨디션도 좋다. 현재는 다시 확고해졌다. 세계1인자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다.”
- 마지막으로 신진서 九단을 응원하는 팬들에게 한마디.
“바둑을 좋아해주시는 팬들에게 항상 감사드리고 있다. 제가 바둑 외적으로도 아직 미숙한 부분이 있는데 많이 노력하고 있다. 잘 봐주셨으면 좋겠다(웃음). 연말에 열리는 천부배와 내년에 열리는 바이링배(신진서 九단 홀로 준결승 진출, 구쯔하오 九단과 대결)는 개인적으로 사활을 걸고 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린다.”
▲ 앞서 신진서 9단의 흑1·3이 통렬했던 이유를 살펴본다. 백4로 단수치면 흑5로 이은 후 A와 B가 맞보기로 백이 곤란하다.
▲ 실전진행. 커제는 4로 단수치고 6으로 몰았지면 이번엔 흑7·9가 좋은 수순. 결국 이번에도 A, B 맞보기에 걸려 하변 백 두 점이 잡히고 말았다. 승부의 저울추도 여기서 흑(신진서) 쪽으로 기울었다.
▲ 사실 커제 9단은 흑1·3의 공격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통상 이런 모양은 이렇게 흑1로 먼저 붙이고 3으로 이단젖히는 게 교과서에 나와 있는 수법.
▲ 하지만 지금은 백4로 뒤쪽에서 단수치는 수가 있다. 백8까지 진행되고 나면 흑이 백△를 잡는다 하더라도 별 게 없는 진행. 커제는 이런 진행을 예상한 듯 하지만 신진서 9단의 예상치 못한 강수를 얻어맞고 KO되고 말았다.
<글/이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