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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의 Healing / 김미리 편 

등록일 2021.04.091,794


뺨과 코를 맞비비면 마음에 파동이 일어난다.
삐쭉 뻗친 수염, 하얗고 누런 털뭉치들.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린 알았다. 영혼의 동반자임을.

침대 한 복판에서 아침 햇살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눈이 반쯤 감긴다. 옴짝달싹하고 싶지 않을 만큼 한가로운 날이다. 오늘은 내 자리에 앉아 아침부터 어수선해 보이는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기로 했다.
‘금방 다녀올게’라며 뛰어 나갔던 그녀가 계단을 총총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수염에 온 신경을 집중해 공기의 세세한 흐름을 느껴본다. 또 낯선 움직임이다. 며칠간 낯선 이들이 내 영역에 쉬지 않고 들락거렸다. 그녀의 친구들은 화려한 빛을 내는 네모 상자를 앞에 두고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또 시끌시끌한 날이 시작되나보다.
방에 누워있던 새하얀 친구 꼬미는 귀를 쫑긋 세우며 낯선 이에게 다가선다. 나는 냄새를 맡느라 정신이 팔린 꼬미를 구경 중이다. 뿌꾸는 쇼파 밑에, 겁 많은 베리는 책상 밑에 몸을 숨기고 상황 파악에 나섰다. 그녀가 다정하게 ‘다미야’ 부르지만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침대 한복판에 웅크리고 있다.

꼬미는 후레쉬가 밝은 빛을 내며 팡팡 터질 때쯤이 되자 낯선 이에게 흥미가 떨어졌다. 카메라가 나타나면 그녀 옆에 적당히 있어주는 것쯤은 이제 알 법도 한데 꼬미는 두툼한 배를 내보이며 바닥에 누워버렸다. 그녀가 장난감 낚싯대로 뿌꾸를 유혹한다. 아주 얕게 점프 솜씨를 보여준 뿌꾸는 소파 밑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낯선 이는 멀리서 나에게 눈을 깜빡이거나 곁눈질을 하며 안심의 신호를 보낸다. 못 본 척 거만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봐야겠다.
그녀가 간식을 손에 들었다. 오! 일주일에 한번 오는 꿀 같은 시간이다. 순간 동공이 확장됐다. 나도 모르게 혀끝을 날름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더 이상 모른척할 수가 없다.

그녀가 나를 번쩍 품에 안으니 밝은 빛이 팡팡 터진다.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로 턱을 쓰다듬어주니 나도 모르게 골골 소리가 났다. 어딘지 조급해 보였던 그녀에게서 안도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편안함을 선물해줘야겠다.
나는 새로운 만남을 즐기지 않지만 낯선 이와 그녀의 대화에 함께 하기로 했다. 나만큼 그녀 ‘김미리’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야옹!


#영혼의 동반자
우연히 길을 지나다 본 아기 고양이가 눈에 밟혔다. 실행력이 남다른 김미리는 분양을 위해 다시 그 곳을 찾았다. 하지만 아기 고양이는 이미 다른 보금자리를 향해 떠났다. 잠시 눈을 돌린 곳에 세상에 온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작디작은 아기가 보였다.
다미와 미리는 눈이 마주쳤다. 다미의 동공이 순간 확장됐다가 세로로 다시 좁혀졌다. 미리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영혼의 동반자임을.
8년 전 다미는 미리네 집으로 왔다. 혼자 두기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다미는 작고 소중했다. 시합이 두 판 열리는 날이면 한판을 두고 다시 집으로 와 다미가 잘 있는지 확인을 하고 다시 대국장으로 향해야 마음이 편해졌다.

미리는 어릴 때부터 막연히 고양이가 좋았다. 다미와 함께하며 고양이에 대해 공부하게 됐고, 가정 분양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유기된 고양이 보호에 앞장섰고, 고양이 보호협회에 기부했다. 유기묘를 위한 자신만의 사랑 방식이었다.
어느덧 다미는 꼬미, 뿌꾸, 베리와 한 식구가 됐다. 작디작았던 다미는 다이아몬드 같이 윤기가 좔좔 흐르기 시작했다. 600그람도 안 되던 꼬미, 뿌꾸, 베리는 볼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네 식구를 보는 미리는 뿌듯함과 함께 사명감도 느낀다.
식구가 늘어나며 김미리는 알레르기가 생겼다. 재채기가 늘었고 바둑 둘 때 숨이 잘 안 쉬어질 정도로 코가 막혔다. 삶에 영향을 받는가 싶었는데 어느덧 극복을 했다. 잠시 스쳐간 괴로운 시간을 제외한다면 다미는 안정을 주는 존재다. 미리는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소울메이트’ 다미가 있으니.

고양이 관련 카페나 인터넷, TV프로그램은 보지 않기로 했다. 혹시 마음이 가는 고양이들이 또 생길까봐 걱정이 돼서다. 하지만 길고양이들은 미리를 금세 알아봤다. 어느 날은 길을 걷는 미리 뒤를 하나둘씩 따라오기 시작했다. ‘분위기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일까? 나한테서 고양이 냄새가 나는 걸까?’하며 내심 뿌듯했다. 집에 와서 뒤늦게 가방 안에 사료가 있었던 것을 발견했지만….

#닮은꼴 다미와 미리
다미는 손이 닿지 않는 곳, 딱 그 거리를 유지하며 미리를 한참이고 바라본다. 미리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봐주는 다미가 좋다. 둘은 큰 파동 없이 한결같다.
미리의 침착함은 SG배 페어바둑최강전 우승으로 이어졌다. 페어대국 파트너는 편안하게 둘 수 있는, 구박하지 않는 사람으로 선택하기 마련이다. 배려와 이해심, 호흡이 중요한 SG배는 입단 10년차 시절 가장 좋은 기억이 있는 대회다.
대회에서 이기고 집에 오는 날이면 미리는 가장 먼저 다미를 찾았다. “언니가 사료값 벌었어!”라고 크게 외친다. 문 앞에 있던 다미는 귀를 살짝 위로 올릴 뿐이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하는 직업을 선택하면서 평온한 마음은 자연스레 훈련이 됐다. 방송 관련 일에 도전하기 위해 아나운서 학원에 갔을 때 유독 침착한 김미리의 텐션을 올리려고 주변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목소리에도 경쾌한 힘이 생겼다.
겸업 중인 유튜브 채널 ‘미리랑 바둑바둑’ 운영에서도 이런 변화가 보인다. 바둑팬들과 거리가 멀게만 느껴져서 유튜브를 시작했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기계치인 것도 있지만 ‘정해진 길이 아닌데, 하는 것이 맞나?’ 멈칫했다. 지금은 시작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김미리는 실패가 두렵다고 고민하기 보다는 바로 결행한다. ‘해볼까?’ 생각이 들면 이미 실행 날짜를 잡고 있다. 하나에 꽂히면 지칠 때까지 해본다. 슬램덩크,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시리즈 등 호흡이 긴 것들을 좋아한다. 인생에 울림을 줬던 책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열 번이고 읽었다.

#잔다르크
다미는 침대 한 가운데 와 앉는다. 잠을 자고, 몸을 단장하고, 밥을 먹고 꼭 같은 곳을 향한다. 꾸준한 다미와 미리는 닮았다.
김미리에게는 박정환을 이긴 유일한 여자기사, 펑리야오를 이긴 ‘잔다르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재능파인 줄 알았는데 변함없는 끈기와 노력으로 일궈낸 기록들이다.

2009년 7월 한국바둑리그. 사람들은 그 날을 또렷이 기억하지만 정작 주인공은 어렴풋하다.  ‘엄청 강하다’는 느낌이 남았고, 지금은 미안하다. 입단한지 1년도 안 된 김미리에게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거대한 존재감을 내뿜던 박정환은 부담이 됐을 것이다. 보너스 같은 대회였기에 즐겁게 두다보니 평생 따라다닐 성적이 하나 만들어졌다. 박정환은 인터넷 대국으로 당시 충격을 완화시켰다고 들었다.
박정환과 두 번째 만남은 2달 뒤에 이어졌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삼성화재배 32강을 준비하는데 옆방에서 부르는 노랫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옆방에는 박정환이 있었다. 김미리는 ‘조용히 해 달라’는 문자를 보냈고 ‘미안하다’는 답장이 왔다. 문자를 왜 보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노랫소리의 주인공은 박정환이 아닌, 선배기사였다는 사실을 훗날 알게 됐다.

재미있는 에피소드 ‘판-스투피드(Stupid)’도 있다. 2012년 비씨카드배에서 중국 강자 펑리야오를 제압하고 파란을 불러일으켰으나 64강에서 판팅위를 만나 패했다. 복기를 하던 판팅위가 좋지 않았던 수를 짚으며 ‘스투피드’라는 표현을 해 널리 퍼진 이야기다.
타인이 보는 빛나는 순간과 자신이 꼽는 찰나의 순간은 다르다. 평생 기억에 남는 재밌는 바둑은 따로 있다. 2013년 화정차업배(현 천태산배) 단체전에서 우승을 한 것인데 박지은과 김채영이 함께 출전했다. 첫 라운드에서 중국에 지고 침체된 분위기였지만 숙소에 모여서 우승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빼곡하게 나열해 봤다. 거기에 길이 있었다. 2장이었던 김미리가 3전 전승을 하며 승수가 높아 우승까지 할 수 있었다. 팀에 기여했다는 것이 기쁨이었다.
과거의 화려한 수식어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다. ‘바르게 열심히 산다’는 것을 알아주면 그걸로 좋다. 몰라도 상관없다. 계속 노력해서 발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왜 나는 항상 즐거울까
바둑에서 졌지만 슬프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바둑에서 져도 신나게 놀기 바빴다. 귀가 시간이 되면 그제야 ‘아! 바둑 졌지’라며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갔다.

‘왜 나는 항상 즐거울까?’에 대해서 고민을 해본 적도 있다. 지독하게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성적이 더 좋았을지 모르겠지만 목표 지향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맞지 않았다. 바둑에서 져도, 슬픈 일이 있어도 다미와 뺨과 코를 맞비비면 그걸로 충분했다.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을 미소로 말 할 수 있는 이유는 긍정의 힘이다.
슬럼프도 있었다. 승부사로 전성기가 20대 초반인데, 24살쯤 우울함이 느껴졌다. 성적이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아 갈림길에 섰다. 광저우아시안게임 바둑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하면서 큰 고비가 있었다.

한 뼘 정도 떨어져있던 다미는 앞발을 길게 내뻗어 기지개를 켜더니 김미리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뒤숭숭한 마음을 감지한 듯 손을 핥아 안정을 줬다. 다미의 위로 덕분이었을까. 슬럼프는 길지 않았다. 바둑 방송과 승부사의 길을 병행하며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 방송에 대한 지적이 왔을 때 카메라가 무서워지기도 했지만 스스로 이겨내는 것 외에는 정답이 없었다. 바둑을 좋아하면 다 이겨내지는 것 같다. 지금은 바둑이 너무 재밌어서 최대한 오래하고 싶다.

새로운 자극을 위해 2년 전부터 프로기사가 없는 볼링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늘 바둑과 함께여서 좋지만 다른 세상도 알고 싶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모르는 사람에게 털어 놓고 싶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단해지고 싶었고, 돌아오지 않아도 베풀고 싶다. 넉넉해지려 한다.
요즘은 부자가 되고 싶다. 돈이 뭐가 중요한가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선택권이 생긴다는 점에서 필요해졌다. 일을 하더라도 자유를 갖고 싶었다. 벌려놓은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끌고 가는 것이 목표다. 존재만으로 힘이 나는 다미가 곁에 있으니 문제없다.
어느덧 서른하나. 김미리에게 프로기사는 ‘좋은 직업’이다. 바둑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소중한 시간들이 있기에 지금을 살기에 충분하다. 또래 여자 기사들이 스러져가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입단하기 어려운 것에 비해서 딱히 전망이 밝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분야도 다 어려울 것이다. 좋아하는 것이 직업이 됐으니 더 없이 만족이다. 김미리는 뛸 수 있는 무대가 있다면 계속 전진할 것이다. 난관쯤은 괜찮다. 다리를 치켜들고 귀를 비비며 마음의 소리를 들어 줄 다미가 있으니.


<글/사진 정연주 타이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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