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기/제10회 BASSO배 직장인바둑대회
참가기/제10회 BASSO배 직장인바둑대회
52년 전통의 월간 『바둑』. 바둑과 관련된 것이라면 안 해본 게 없었던 본지에서 새로운 콘텐츠를 선보인다. 바로 요즘 ‘핫’ 하다는 체험기인데, 바둑대회를 참가한 체험이니 참가기라고 해야겠다. 연구생 1군 출신 기자 2명에 모 인터넷 바둑사이트 ‘왕별’ 편집장까지. 역대 최강의 기력을 자랑하는 월간 『바둑』팀은 처음 출전한 BASSO배 직장인바둑대회에서 어떤 성적표를 받을까?
바둑돌도 둥글었다
지난 1월, 본지에 첫 참가기가 게재된 후 한 달쯤 시간이 흘러 BASSO배 담당 PD에게 연락이 왔다.
“대국 상대가 포스코로 정해졌습니다. 19일 오전 10시까지 스튜디오로 와 주시면 됩니다~”
이럴 수가. 두 가지 악재가 겹쳤다. 첫 번째는 포스코는 지난 9회 대회까지 무려 네 번(1, 2, 5, 6회) 우승을 차지한 BASSO배 최다 우승팀이라는 것. 월드컵의 브라질 같은 영원한 우승후보랄까. 두 번째는 19일이 월간『바둑』(이하 ‘월바’) 공포의 마감기간이라는 점이었다.
선수교체
포스코와의 대결을 앞두고 ‘선수교체’가 있었다. 월바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구기호 편집장이 촉박한 마감 일정 탓에 홀로 편집사무실을 지키고 작년부터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막내 조범근 선수가 투입됐다.
대국 하루 전이었던 1월 18일 금요일, 마감 작업이 한창이던 때였다.
“대국이 벌써 내일인데, 준비는 잘 하고 있는거지?”(구기호 편집장)
“보시다시피 마감에 찌든 상태라서… 산더미처럼 쌓인 교정지를 보니 오늘도 철야 작업을 해야되지 않을까요?”(김정민·이영재 기자)
“벌써부터 바둑 지면 마감 탓 하려고 폼 잡는 게 보이는데? 여긴 내가 남을 테니까 너희는 오늘은 이쯤하고 들어가 봐.”(구 편집장)
“정말입니까? 마감기간에 정시퇴근이라니!”(김·이 기자)
“대신, 지면 돌아오지 마. 거기서 그냥 죽어!”(구 편집장)
다음날(1월 19일) 오전, 결전의 시간이 찾아왔다. 최기훈 감독의 ‘작전 회의’가 시작됐다.
“3판 2선승제는 역시 1국이 가장 중요한데, 오더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지난번 CU랑 했을 때 이긴 오더가 괜찮지 않았나요? 이번엔 초반을 편집장님 대신 ‘젊은 피’(조)범근이가 맡고, 중반(김정민 기자) 종반(이영재 기자)은 그대로 가는 게 어떨까 싶어요.”
“포스코는 어떻게 출전할까요?”
“음… 아무래도 (이)도연이 형이 초반일 것 같고, 중반은 (김)수영이, 종반은 역시 (서)정인이형이겠죠.”
예상대로였다. 강력한 우승후보 포스코에선 연구생 출신 이도연 선수가 초반을 맡았고, 여자 아마랭킹 1위 김수영 선수가 중반을, 연구생 1군 출신의 서정인 선수가 종반 주자로 출전했다.
월바와 포스코의 맞대결은 주관 방송사 K바둑에서도 초미의 관심사. 급기야 ‘내기’가 성사됐는데 월바의 승리를 점친 쪽이 더 많았다는 후문이다.
이윽고 기선제압이 걸린 1국이 시작됐다. 초반은 데뷔전을 갖는 월바의 조범근 선수와 포스코의 베테랑 이도연 선수의 대결. 돌가리기에서 원하던 흑을 잡은 조범근 선수는 발빠른 운석으로 판을 리드했다.
중반은 양팀의 화력을 담당하고 있는 ‘호방함의 대명사’ 월바 김정민 기자와 ‘여자 가토 마사오’ 김수영 선수가 만났다. 참고로 가토 마사오는 과거 세계를 떨게 만들었던 일본의 ‘대마킬러’다. 바둑은 흑(월바)이 우세한 상황에서 선택의 기로. 무난하게 중앙으로 한 칸 뛰느냐, 상변 백 진영을 침입하느냐.
온건파인 필자는 김 선배가 침착하게 한 칸 뛰고 판을 변수 없이 좁혀주길 간절히 바랬지만, 약 5분간 장고(長考)하던 김정민 기자는 상변 백 진영에 풍덩 뛰어들었다. 바둑 얘기 할 때 김 선배가 종종 했떤 말이 떠올랐다. “나는 ‘고’냐 ‘스톱’이냐 할 땐 항상 고야!”
반상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난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실제론 약 20수 남짓, 외길수순을 빼면 대략 10수 정도 둔 느낌으로 바통은 종반 선수에게 넘겨졌다.
남대문 시장통 같은 상황속에서 필자의 차례가 왔다. 원하던 흐름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바둑은 우세했다. 대마를 무탈하게 살리기만 승리를 가져갈 수 있는 국면.
하지만 직장인 바둑대회 ‘끝판왕’으로 명성이 자자한 포스코의 서정인 선수가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작은 손해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변 흑대마 공격에 ‘올인’하는 작전을 들고 나와 바둑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살면 이기고 잡히면 지는 극단적인 사활 싸움.
패라는 구명조끼를 입고 삶을 도모하고 있던 필자는 자체팻감이 많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됐다’는 마음으로 잠시 긴장이 풀렸을 때, 필자는 믿을 수 없는 착각을 범했다. 헛패를 쓰고 만 것이다!
1도(기보는 월간 『바둑』 2월호 102쪽 참조) 흑1로 팻감을 쓴 수가 필자를 아직도 잠 못들게 하고 있는 자살골. 백2로 패를 해소하는 순간 대역전이 이뤄졌다. A로 발버둥쳐도 알파벳순으로 B~F면 흑대마가 꼼짝없이 잡힌 모습. 흑1은 우변 G, 혹은 중앙 H 등으로 팻감을 사용했으면 흑의 승리였다.
9회말 투입된 마무리 투수가 3-0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만루홈런을 얻어맞은 꼴이었다. 천부배 결승 최종국에서 다잡은 승리를 놓치고 돌을 거둘 때 신진서 九단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야말로 망연자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하릴없이 돌을 거두고 검토실에 들어서자 김 선배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인지 ‘갈굼’인지 모를 멘트를 건넸다.
“괜찮아~ 너도 이제 만으로 서른이잖아? 이런 실수는 어쩔 수가 없는 거야. 천재지변 같은 거지.”
하지만 일본에서 7대 기전만 벌써 43회나 우승한 이야마 유타도, 천부배에서 세 번째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을 거머쥔 천야오예도, 여전히 건재한 한국의 김지석·강동윤 九단도 모두 필자와 동갑(1989년생)인데…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때마침, 을지로의 편집실에서 마감작업 중이던 편집장님으로부터 1국 결과를 묻는 연락이 왔다.
“저 그게… 2-1로 이길 예정입니다….”
2국부터 배수의 진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고 월바에선 에이스 김정민 기자가 최기훈 六단과 함께 페어대국에 출전했다. 두 사람은 페어대국을 함께 두는 건 처음이었지만 과거 연구생 시절 같은 도장에서 동문수학했던 사이. 과연 멋진 호흡으로 완승을 이끌며 승부를 1-1 원점으로 돌렸다.
2도(기보는 월간 『바둑』 2월호 103쪽 참조) 흑1이 필자를 구원한 김 선배의 회심의 일격.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걸 입증한 묘수였다. A로 건너는 수와 B로 붙여 흑a를 부활시키는 수를 맞보는 절묘한 수로 결정타가 됐다. 김 선배는 최기훈 六단이 출제하고 있는 본지 <단급인정시험> 끝내기 문제에서 본 수 같다며 겸손해하기도.
눈만 꿈뻑꿈뻑
대망의 마지막 3국. 포스코는 이때를 위해 2국에서 아껴둔 에이스 서정인 선수가 등판을 준비하고 있었다(직장인 바둑대회는 한 선수가 최대 2번 출전할 수 있다). 월바에선 당초 이런 오더라면 최종국엔 필자의 출전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1국에서 충격적인 역전패로 ‘멘붕(멘탈붕괴)’이 온 필자 대신 조범근 선수가 출전을 자청했다. “선배님은 그냥 머리나 식히고 계십쇼. 제가 마무리하고 오겠습니다.”
포스코 서정인 선수는 필자가 카메라를 들고 대국장에 들어서자 살짝 놀란 눈치.
“당연히 네가 나올 줄 알았는데. (1국 진 거)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는 줄 알았지.”(서정인)
“저희에겐 ‘비밀병기’가 있어서요.”(이영재)
최종국은 뜻밖에도 기량 대결이라기보다 ‘심장 싸움’이었다. 양쪽 모두 실수가 있었고 바둑은 처음부터 끝까지 엎치락뒤치락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종국엔 ‘반집 승부’. 김 선배는 ‘어떻게 해도 바둑이 된다’며 신기해했고, 감독 최기훈 六단은 ‘근래 본 바둑 중 가장 재미있다’며 검토를 멈추고 팝콘을 들었다.
백(월바)의 ‘반집승’이 유력한 국면에서 월바의 막내 조범근 선수의 손이 승리의 땅 좌변을 외면한채 중앙으로 향했다. 검토실에선 탄식이 흘러나왔다.
“월간 『바둑』팀은 신년호부터 <참가기>를 연재하고 있었는데요. 읽어보니 이 대회에 굉장히 공을 들이고 있더라고요.”(최유진 바둑캐스터)
“계속 이겨서 올라가야 연재를 이어갈 수 있는데… 아무래도 힘들어 보입니다.”(BASSO배 해설위원 김영환 九단)
의자 뒤로 몸을 젖히고 괴로워하던 포스코 서정인 선수의 눈이 번쩍 뜨였고, 번개 같은 손길로 요충지 좌변을 차지하자 형세는 역전. 이후 끝내기 실수가 이어져 결과는 흑(포스코)의 2집반 승리였다.
승리를 호언장담했던 조범근 막내 기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꿈뻑꿈뻑하고 있었다.
“이 수가 좋았지?”(서정인)
“……”(조범근)
막내는 입이 없어진 듯 말을 하지 못했다.
허무한 탈락이었다. 단 두 판 만에 월간『바둑』의 도전은 아쉽게 끝이 났다. 편집장님께 ‘비보’를 전하는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이게 다 제 탓입니다. 제가 18급 같은 실수로 대마를 때려죽이지만 않았어도…”(이 기자)
“아니야… 내가 안전하게 둬서 분란을 만들지 말았어야 하는데. 내 탓이 크다.”(김 기자)
“제가 바둑을 너무 오랫동안 쉬었던 것 같습니다. 끝내기에서 그런 실수를 하다니… 전적으로 제 책임입니다.”(조범근 객원기자)
돌아오는 차 속은 무거운 침묵만 맴돌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대회를 위해 만든 톡방에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다. 편집장님은 단 두 글자의 답장을 보냈다. “할복”
그 메시지를 확인한 우리는 일단 차를 세웠다. 마지막 만찬이라는 생각으로 족발집에 들어갔다. 입맛이 없어야 되는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세상 맛있었다. 그렇게 뼈까지 발라먹고 나오자 다시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찾아왔다. 직장인바둑대회 참가신청서를 쓸 때부터 마지막 판을 두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어디서 이 생을 마감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편집장님의 메시지가 이어왔다.
“하지 말고 집에 가서 마감원고 쓸 것. 일요일까지 못 끝내면 월요일 출근할 생각하지 말고. 모두 고생 많았다.”
한 줄기 서광 같은 메시지였다. 아아, 그래. 우린 프로기사가 아니라 기자였지. 바둑 따위 지면 어떤가. 마감이 더 중요하지. 훈훈한 감동에 김 선배가 웃으며 물어본다.
“하하, 감사하게도 수명이 연장됐네. 난 사실 어제 밤에 대부분 써놨는데, 영재도 거의 다 했지?”
2차 ‘현타’가 왔다. 지난 밤 운기조식을 한다며 그동안 못 잤던 잠을 몰아 잔 탓에 원고는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던 것이다. 내일(일요일)까지 다 끝내지 못한다면 그땐 진짜 할복이라도 해야 할 터. 직장인바둑대회 우승의 꿈은 내년으로 미루고, 우리는 다시 펜대를 잡았다. 다시 잡은 펜은 아직 따뜻했다.
<글/이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