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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 - 제1편 조남철(下) 

등록일 2019.02.262,414

▲ 신문기전 창설로 한국바둑을 일으킨 조남철 九단.
▲ 신문기전 창설로 한국바둑을 일으킨 조남철 九단.

특별기획/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 - 제1편 조남철(下)

‘바둑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2018년 11월 5일, 한국기원은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을 선정 발표했다. 본 특별기획에서는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고(故)조남철 선생을 비롯해 바닥이던 한국바둑을 세계최강으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김인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등 한국바둑의 거장 7인의 삶과 업적을 총 14회(국수 1인당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신문기전 창설로 한국바둑 일으키다
- 국수전 9연패로 무적시대 구가

■글 _ 안성문(바둑리그 전문기자)

1957년 10월 24일 서울 청계천로의 동아일보 편집국에는, 그날 석간을 받아본 독자들의 문의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 평소의 바둑란 옆에 그보다 두 배되는 크기의 백지 기보가 인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걸 보고 무엇을 하라는 걸까.
이튿날은 제2기 국수전 도전7번기 1국이 있는 날이었다. 조남철 국수가 의사 출신의 엘리트 민영현 二단(작고)을 맞아 첫 도전기를 펼칠 예정이었다.

빈 기보 옆에 안내문이 있었다. 내일은 대국 실황을 라디오에서 중계할 것이니, 빈 기보에 수순을 따라 적어가면서 대국을 감상해보라는 것이었다. 이튿날, 과연 KBS에서는 한 시간마다 뉴스가 끝난 후에 대국 진행을 중계방송했다. “제1착은 17의 4, 제2착은 4의 3, 제3착은 16의 17…. 이런 식으로 착점의 위치를 좌표로 불러주는 것이었다.

TV가 없던 시절이었다. 라디오로 바둑을 생중계한다는 발상 자체가 기상천외했다. 그러나 1회성으로 그치고 만 것으로 보아 독자들의 반응이 기대했던 것만큼 열광적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리 열렬한 바둑팬이라고 해도, 라디오 옆에 앉아 백지 기보 위에 수순을 표시해가면서 바둑을 감상하는 일이 어디 쉬웠을까.

그럼에도 이 라디오 중계는 당시 막 대중적 인기를 얻어가던 바둑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지금의 일본 요미우리신문을 만든 일등 공신이 바둑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언론 또한 바둑을 매개로 하여 성장했다. 그 중심에 국수전이 있었다.   

기보 게재는 필수, “5만부가 왔다 갔다 했다”
국수전은 한국바둑의 현대화 과정에 탄생한 최초의 본격 기전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당시, 조남철은 동아일보에서 받은 기보 원고료를 상금에 보탤 정도로 이 대회에 매달렸고, 그 결과 56년 ‘국수 제1위전’이 창설됐다(묘한 대회 명칭은 원로급 기사들 모두가 ‘국수’로 불리던 관습 때문이었는데 11기부터 ‘1위’가 떨어져 나갔다).

국수전은 이후 한국바둑 최고실력자의 계보를 형성하면서 든든한 한국바둑의 뼈대 역할을 해왔다. 2015년 59기 우승자 박정환을 배출하고 중단되기까지(사라진 게 아니라고 믿고 싶다) 국수에 오른 기사는 거의 대부분 당대 한국바둑의 1인자들이었다. 반세기 훨씬 넘는 세월 동안 명멸해간 숱한 타이틀전의 뿌리는 국수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기도 대단했다. 조남철 국수는 생전에 “기보 게재 여부에 따라 부수가 5만부(요즘으로 치면 50만부)이상 차이 난다고 바둑 담당 기자가 말했다”고 회고했다. 나아가 “국수전 창설 이후 신문에 정기적으로 기보가 실리면서 바둑 보급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며 “이후 서울신문 패왕전(1959년), 부산일보 최고위전(1960년) 등 신문기전이 경쟁적으로 생겼다”고 밝혔다.

시작 전부터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첫 대회는 7월에 시작되어 9월에 끝났다. 예선을 거쳐, 4명이 본선 리그를 벌인 결과 예상했던 대로 조남철이 우승했다. 제2기부터는 도전기가 채택됐다. 3기까지는 7번기였다. 처음에는 무조건 7번을 다 두었으나 7-0의 일방적인 승부가 나자 3기 때는 패자의 체면도 생각해야 한다는 뜻에서 7전4승제로 바뀌었다. 그래도 조남철의 일방적 승리(4-0)에는 변함이 없었다. 

조남철의 전성시대, 아니 독주시대였다. 이 시기 그 누구도 조남철의 압도적 기량을 당해낼 수 없었다. 노국수들은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못했고, 비슷한 연배인 김봉선, 김명환 등은 역부족이었다. 기대를 걸어볼 만한 대상인 조상연, 김인 등 10대 유망주들은 겨우 실력이 영글기 시작한 상태였다. 조남철은 60년대 중반까지 주 무대인 국수전뿐만 아니라 패왕전(4연패. 59~62년), 최고위전(7연패. 60~67년)에서도 승승장구하며 무적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 1957년 10월 25일자 동아일보 신문. 일명 ‘백지기보’가 실려 화제가 됐다.


일반적 승리로 끝난 치수고치기 10번기
1956년 10월 15일, 제1기 국수전이 시상식을 마친 뒤로부터 정확히 보름 후, 연합신문이 주최하는 ‘치수고치기 10번기’가 시작됐다. 국수전에 열광했던 바둑팬들의 이목은 자연스럽게 이 짜릿짜릿한 승부의 장으로 옮겨갔다. 

치수고치기는 글자 그대로 ‘치수가 고쳐지는’ 대국이다. 총 열 판을 한도로 승부 차이가 4승이 나게 되면(4-0, 5-1, 6-2, 7-3 등), 패자는 자신의 기량이 상대에 못 미침을 인정하고 치수를 조정당하는 굴욕을 맛봐야 한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승부사에게 있어 이것은 주홍글씨를 이마에 새겨 넣는 것과 같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1930년대 우칭위안(吳淸源)과 더불어 일본바둑계를 좌지우지했던 또 하나의 천재 기타니 미노루(木谷實)가 일찌감치 승부의 장에서 내려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게 된 것도 두 차례 우칭위안과의 치수고치기 승부에서 패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가혹함을 띤 대결이었기에 연합신문은 ‘위험수당’조로 당시로써는 파격의 대국료를 내걸고 조남철과 대결할 상대를 구했다. 첫 대결이 인기를 끌면 조남철을 고정으로 앉혀 놓고 다른 기사들을 계속 돌아가며 붙일 계획이었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그 누구도 승산이 없다 보니 감히 조남철의 치수를 고쳐보겠다고 나서는 기사가 없었던 것이다. 

멍석을 깔아놨는데도 조연 배우가 나타나지 않으니 신문사로선 애가 탈 노릇이었다. 겨우 겨우 설득한 끝에 마침내 1번 타자로 나선 것이 당대 2인자였던 김봉선. 1956년 10월, 정선 치수로 시작된 이 10번기는 12월에 5대1의 스코어로 치수가 고쳐졌고, 김봉선은 나머지 대국을 포기했다.

처음이 어렵지 이후는 쉬웠다. 1957년 1월엔 호남의 맹장 김명환이 정선 치수로 10번기를 시작했으나 결과는 역시 5대1. 6국에 이르러 치수가 고쳐졌고, 김명환 역시 나머지 대국을 포기했다. 이후로도 신호열, 장국원, 민영현 등이 줄줄이 나섰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치수가 고쳐지는 굴욕을 당했다. 

이처럼 조남철과 대결을 펼칠 수 있었던 기사가 죄다 패퇴하자 대(對) 조남철 치수고치 10번기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연합신문은 이후 ‘김명환 대 김봉선’, ‘김봉선 대 조상연’ 등의 2진급 매치로 속편을 제작해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선에서 10번기의 막을 내렸다.   

 

1960년대 당시 바둑계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으로 촉망받던 동료 프로기사들과 함께 한 김인(맨 앞). 그 뒤로 조상연, 최창원, 윤기현, 김재구, 이창세 등이 보인다.



무서운 10대들의 등장과 국수전 9연패
 
경쟁자가 없는 일인자는 외롭다. 해당 종목의 흥행에도 독주는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이유로  조남철은 철옹성의 왕국을 구축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젊은 기재의 등장에 목말라했다.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바둑 열기에 신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남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바둑란을 재미있게 만들어줘야 했고, 승부가 재밌어져야 했다. 다행히 국수전의 탄생을 기점으로 10대 청소년들의 입단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1956년 제4회 입단대회에서 조남철의 조카인 조상연이 15세의 나이로 첫 테이프를 끊었다. 58년 봄, 제7회 때는 15세의 김인과 19세의 강철민이, 이듬해엔 19세의 고재희와 17세의 윤기현이 프로가 되었다. 60년에는 20세의 이창세와 21세의 김학수가, 62년에는 9세의 조훈현이 세계바둑사상 최연소 기록을 세우면서 입단에 성공했다. 18세의 김수영이 조훈현의 입단 동기였다.

조남철은 자기 일처럼 이런 변화를 뿌듯해했다. 특히 명문고등학교 출신인 이창세(경기)와 강철민(경남)의 입단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는데, 명문 수재들이 다른 것을 하지 않고 바둑을 택했다는 것은 바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수표교 옆을 지날 때마다 아낙네들로부터 “저기 노름대장 간다.”고 손가락질을 받던 조남철이 아닌가. 그 괴로운 시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기재는 일단 입단한 나이가 말해준다. 속속 들어오는 준재 중에서도 15세 입단의 조상연과 김인, 그리고 조훈현이 돋보이는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조상연과 조훈현은 얼마 안 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남은 것은 강진이 낳은 천재, 김인뿐. 국내의 관심은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1962년 6기 국수전에서 만 19세의 김인이 마침내 도전권을 얻는다. 조남철보다 꼭 스무 살 아래인 10대 도전자의 등장이었다. 바둑계는 흥분했다. 국수전 주최사인 동아일보도 도전3번기를 5번기로 늘리는 등 흥행을 고조시키고자 노력했다.  

2월 11일, 모두가 주시하는 가운데 도전1국이 열렸다. 당시 규약은 도전4국까지는 덤이 없었다. 김인은 첫 판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 ‘10대 풋내기가 조남철과 무승부라니’ 이 사실만으로도 팬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김인은 다음 2, 3국을 내리 졌고, 4국은 건졌지만 최종국인 5국에서 패하면서 1승1무3패로 물러섰다. 실력 부족을 절감한 김인은 도전기가 끝난 직후인 3월에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김인이 일본에 가 있는 동안 국내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기사는 이창세였다. 김인 보다 세 살 연상인 그는 63년 7기와 64년 8기에 연거푸 조남철 아성을 두드렸으나 간발의 차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특히 8기 때 이창세는 3국을 극적인 반집 차로 승리하면서 2대1로 앞서나가고도 4, 5국을 패배, 조남철에게 국수 8연패를 진상했다. 이창세는 조남철을 먼저 막판까지 몰아넣은 최초의 기록을 남기고 홀연히 독일 유학을 떠난다.

조남철 왕국은 이듬해 또 한 명의 젊은 도전자 윤기현마저 돌려세우면서 9연패라는 위업의 정점에 서게 된다. 당시 42세의 나이. 조남철은 월간『바둑』과의 인터뷰에서 “(9연패가) 나 개인으로는 기쁜 일이나 하루속히 기술이 나은 강자가 다음 자리를 이었으면 한다. 바둑 보급에 전념해 온 심정으로 10기까지 채워 보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기계 전체를 생각할 때 그것은 그만큼 침체되는 것이므로 신예들이 하루속히 계승하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이 씨가 되었을까. 1965년 바둑계는 새로운 세대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리기 시작했다. 

바둑사 최대의 사건, 조남철 왕국 무너지다  
‘사람은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거기에서 오랫동안 살 수는 없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말이다. ‘권불10년(權不十年)’이란 말도 있다. 위세 높은 권력도 10년을 가기는 어렵다. 국수 타이틀을 9년 연속 쥐며 바둑계를 호령하던 조남철의 아성은 10기를 맞이하면서 마침내 무너진다. 23세의 해맑은 미남 청년 김인 五단에 의해 제10기 국수전서 1승3패로 패퇴한 것이다. 1966년 2월 끝난 이 반란은 대한민국 바둑사에선 그야말로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영원불멸일 것 같던 ‘국수=바둑=조남철’의 등식이 깨졌기 때문이다.

김인이 국수에 등정한 이 무렵은 바둑사적으로 변혁의 시기에 해당했다. 어떤 거역할 수 없는 기운이 새 시대를 재촉하며 솟구쳐 올라오던 중이었다. 바둑 종가를 자처하던 이웃 일본에선 김인보다 한 살 위인 24세의 린하이펑(林海峯)이 ‘일본판 조남철’이라 할 사카다(坂田榮男)의 아성을 허물고 명인에 올라섰다. 한·일 두 나라 바둑계에 약속이나 한 듯 세대교체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있었다.

국수를 잃은 충격이 컸을 법 했지만 조남철은 의외로 담담했다. “언젠가는 한 번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나도 이제 공부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정도의 소감을 밝혔다. 그동안 바둑 보급에 신경 쓰느라 본인의 실력을 다지지 못했다는 뜻이자 다시 공부에 힘쓰면 타이틀 탈환도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피력한 것이었다.

이때 조남철의 나이가 43세. 좌절하기엔 아직 한창의 나이였다. 시간은 아직 넉넉했고, 또 충분했다. 조남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사람들도 그가 곧 전열을 정비해 돌아올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뜻밖에도 조남철은 사람들의 예상처럼 빨리 돌아오지를 않았다. 돌아오기는커녕 이후 조남철의 타이틀은 차례차례 김인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조남철은 68년에 만들어진 ‘명인’ 타이틀의 초대 성주에 취임하는 것으로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잠깐이었고, 그것도 이듬해에는 김인에게 양보하면서 마침내 타이틀이 하나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조남철은 이때의 심정을 가까운 친구이자 명인전 관전기자인 권희철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아주 혼란스러웠어. 다시 일어서는 것이야 당연했고 자신도 있었어. 한데 그게 마음만 급했지 잘 안 되는 거야. 너무 오랫동안 혼자 달려온 후유증 같은 거라고나 할까. 팽팽한 상대와 만나 늘 긴장하며 칼을 갈아왔어야 하는 건데, 승부 외적인 일에 동분서주하면서 집중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던 거야. 그러다가 막상 강한 상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었던 거지.”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조남철이 아니었다. 무관(無冠)으로 전락하자, 그제야 마음이 비워지면서 심기일전이 되었을까. 70년대 접어들자마자 조남철은 국수, 패왕, 왕위, 명인 등 4대기전의 도전권을 휩쓸며 김인과의 일대 결전을 선언한다.

 

▲ 김인의 도일 이후 이창세의 비상(飛翔)이 시작됐다. 제7~8기 2년 연속 도전권을 거머쥔 이창세 三단은 그러나 조남철 국수의 연패 저지에 실패했다.     


▲ 운당여관에서 열린 제9기 도전1국. 1964년도의 왕운을 독점한 듯, 승승장구하던 윤기현 五단(왼쪽)과 9년 연패의 위업을 눈앞에 두고 필승의 신념을 불태우고 있는 바둑계의 노장 조남철 八단.


조남철-김인 20번기와 명인 양위  
왕위, 패왕, 국수, 명인의 순서로 진행된 도전기는 각각이 5번기였으므로, 70년 가을에서 71년 봄에 이르는 시즌에 조남철과 김인은 사상 유례 없는 20번기를 치르는 셈이었다. 10월 30일 왕위전 1국으로 시작된 이 대격돌은 해를 넘겨 1971년 2월 16일 명인전 5국이 끝날 때까지 부활의 영광을 찾으려는 조남철과 한번 차지한 왕좌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김인의 대결로 불꽃이 튀겼다.

그 첫 매치인 왕위전에서 조남철은 한 판도 건지지 못하고 영패로 무릎을 꿇었다. 패왕전에선 한 판을 건지는 데 그쳐 1승3패로 물러났다. 국수전에선 풀세트 접전을 벌였으나 2승3패로 분루를 삼켰다. 토털 스코어 3-0. 20번기의 대장정에 오를 때의 의욕과 투지는 어느새 종잇장처럼 엷어졌고, 47세라는 나이에서 오는 체력적 부담은 갈수록 천근만근이었다.   

위안이라면 0 대 3, 1 대 3, 2 대 3으로 도전기를 거듭할 때마다 한 판씩 더 이겨가고 있었다는 것. 마지막 대결인 명인전을 앞두고 조남철은 권희철에게 “두고 봐, 이제서야 김인의 바둑이 어떤 것이라는 게 감이 잡히고 있는 중이야. 이런 식이라면 다음은 내가 3 대 2로 이기는 스토리가 돼야 하는 거 아냐.” 농반을 섞어가며 얘기했는데 희한하게도 이것이 현실이 되었다.

왕위, 패왕, 국수전에서 실패한 조남철은 명인전에선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양 펄펄 날았고, 착점 또한 당당했다. 국수전에 이어 또 다시 풀세트까지 가는 난타전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3승2패, 조남철의 승리였다. 조남철은 만장의 박수 속에 명인에 컴백했다. 얼마 만에 받아 보는 박수인지 몰랐다.

그러나 이때 조남철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바로 등 뒤에서 서봉수라는, 젊은 날의 자신을 연상케 하는 비쩍 마른 청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자신의 운명이 마지막 화려한 불꽃을 터뜨리고 사라지는 폭죽처럼 될 거라는 사실을.

 

▲ 권좌에서 내려온 조남철은 이후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국수전에서 세차례(제10·13·15기) 도전자로 나서지만 모두 김인에게 패퇴한다. 사진은 1971년 15기 국수전 도전4국 조남철과 김인(왼쪽)의 종국 후 복기 장면.


이듬해인 72년 벌어진 조남철과 서봉수의 명인전 도전5번기는 19세 도전자와 49세 챔프간의 한 세대를 뛰어넘는 세월을 두고 벌어진다. 꼭 30년의 격차. “서봉수가 스물 몇 살에 三단만 되었더라도….” 바둑사에 남을 유명한 한마디를 남기고 조남철은 쓸쓸히 중앙 무대에서 내려온다. 
“이것도 인과의 법칙이 아닌가 해. 30년쯤 전에는 청년 조남철이 대개 30년 이상 나이가 많았던 노국수들을 차례로 쓰러뜨렸었는데, 그로부터 30년쯤 지나자 조남철이 30년 연하의 애송이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말이야. 허허.”

“어떤 경우라도 즐겁다고 생각하라”
선생이 세상을 뜨기 3년 전, 모 일간지에서 어렵게 선생과 인터뷰를 가진 것이 있다. 선생은 당시 ‘60년 담배’도 끊고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던 상태였다.
“생애에 가장 기억이 나는 승부는 무엇입니까.” 기자가 물었다. 선생은 흘리듯 받아넘겼다.  
“9연승을 하다가 김인이에게 졌지. 나중엔 서봉수한테도 졌고….” 
이게 전부였다. 열아홉 살에 망국의 설움을 딛고 프로가 되어 57년 동안 셀 수도 없는 승부를 치른 선생이었지만, 돌아보니 승부란 게 별 게 없었다는 투였다.  

하지만 선생은 인터뷰 말미에 “꼭 하고 싶은 말씀을 해달라.”는 요청에 대해선 남은 기력을 쥐어짜기라도 하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두 가지였다.  

“프로기사가 바둑만 잘 둬선 안 돼. 인간의 기본적 예법을 잘 지켜야 해. 바둑 공부만 하다가 자칫 소홀할 수 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잘 배워야 돼.”

“그야말로 눈물, 웃다가 울다가 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내가 죽게 생기니까 이제야 속을 체리는 모양인데, ‘어떤 경우라도 즐겁다고 생각하라’ 그걸 말해주고 싶어요.”

다시 한 번 선생의 명복을 빈다.

 

▲ 조남철 九단.


▲ 1968년 김인 국수에게 조남철 八단이 재도전한 제13기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동아일보에서는 사옥 앞에 대형바둑판을 설치, 대국 상황을 바둑팬들에게 전달했다.



 

▲ 국수 김인 이양 후 명인에 올랐던 조남철은 72년 제4기 명인전 도전기에서 당시 19세였던 서봉수(왼쪽)에게 패한 뒤 다시는 타이틀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사진은 제4기 명인전 도전3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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