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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 - 제2편 김인(下) 

등록일 2019.04.103,095

영원한 국수 김인 九단.
영원한 국수 김인 九단.

‘바둑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2018년 11월 5일, 한국기원은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을 선정 발표했다. 본 특별기획에서는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고(故)조남철 선생을 비롯해 바닥이던 한국바둑을 세계최강으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김인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등 한국바둑의 거장 7인의 삶과 업적을 총 14회(국수 1인당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영원한 국수로 남은 낭만시대의 거인
- 조남철에 이어 한국바둑의 찬란한 개화기 열어


■글 _ 안성문(바둑리그 전문기자)

김인의 전성시대는 조남철 때 이상으로 화려했으나 그 기간은 10년 남짓으로 짧았다. 김인은 명동시절의 마지막 해인 1965년 난공불락의 조남철 九단으로부터 국수를 쟁취했고, 관철동 시절의 중반부인 77년 그의 마지막 타이틀 패왕을 잃었다. 사람들은 그가 곧 전열을 정비해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올드팬들이 지금도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김인이라는 해가 뜨겁게 중천에 걸려 있었던 그 시절, 1960년대 후반으로 가 보자. 정국(政局)은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어 있었고 민심은 혼란스러웠다. 68년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러 오는 통에 나라가 발칵 뒤집혔고, 69년엔 3선 개헌의 여파로 거리마다 데모 물결이 넘쳤다.

묘하게도 바둑동네만은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종로 2가 도심에선 최루탄 가스가 안개처럼 넘실대고 있었지만, 그 두 블록 뒤 적요한 뒤뜰 같았던 관철동에선 따뜻한 바람이 불고 새로운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일찍이 없었던 백화제방(百花齊放)의 기운, 그것이었다.  

먼저 한국기원이 생긴 지 10년이 지나면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청소년들의 입단이 줄을 이었다. 69년 봄, 서울 영천 독립문 이북에서는 적수가 없었던 김희중이 서울법대 출신의 홍종현과 나란히 프로가 되었다.

70년 가을에는 17세의 까까머리 서봉수가 네 살 위의 양상국과 입단대회를 통과했고, 71년에는 19세의 장수영이, 이듬해엔 불과 14세의 중학생인 서능욱이 두 살 위 백성호와 대단한 화제를 뿌리며 입단했다. 60년대 중반 30명 남짓에 불과했던 프로기사 수도 이 무렵에는 50명을 훌쩍 넘어섰다. 질적 양적 성장이 동시에 이뤄졌다.  

여기에 해외 유학파의 귀국이 잇따랐다. 70년 3월, 김인보다 한 살 위의 윤기현이 2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국내무대로 돌아왔다. 또 그 한 달 후에는 하찬석이 김포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찬석의 경우는 1급이었던 63년 12월에 떠났다가 6년 4개월 만에 일본기원 프로기사 五단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었다. 여기에 72년 3월 귀국하여 공군사병이 된 조훈현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70년 가을부터 71년 봄에 이르는 시즌까지 조남철의 대공세를 막아낸 김인에게 사방에서 난적들이 동시에 밀어닥친 것이다.  

▲ 72년 제12기 최고위전 도전2국이 열린 서울 로얄호텔 앞에서 담소를 나누는 김인과 강철민 도전자. 김인 七단이 3-0으로 2연패, 통산 3회 우승했다.

    
# 민란(民亂)의 시대...조훈현 변방 강자 부상  
72년 19세의 서봉수 二단(당시)이 혜성처럼 나타나 명인전에서 김인 조남철을 연파하고 타이틀을 쟁취했다. 세상을 떠들썩케 한 반란이었고, 난세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김인 역시 1인자의 상징과도 같았던 국수를 윤기현에게 내주면서 철옹성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듬해엔 역시 일본유학파 하찬석에게 국내 최대의 왕위 타이틀마저 내주면서 7년 아성이 무너져 내렸고, 74년 최고위전서는 꼭 10년 아래의 동향 후배 조훈현에게 옥새를 내주고 변방의 성주로 전락하고 만다. 대명천지를 화사하게 덮었던 벚꽃이 일거에 자취를 감추듯 전혀 뜻밖의, 급작스러운 몰락이었다. “그깟 타이틀 하나 내주었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라고 믿었다. 곧 도로 찾아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게 아니더군.” 김인의 회상이다.

바둑계의 지도는 매년 변했다. 왕위전만 해도 74년 하찬석, 75년 김인, 76년 서봉수로 임자가 바뀌었고, 국수전은 72, 73년은 윤기현, 74, 75년은 하찬석이었다. 도전자 군엔 노영하 四단, 강철민 五단 등이 명함을 내밀었고, 장두진 二단도 반짝 모습을 드러냈다.

‘속기의 명수’ 김희중 五단은 76년 정창현 七단을 3대2로 꺾고 기왕을 따냈다. 두 기인의 타이틀 매치는 당시 숱한 화제를 낳았다. 김희중이 정창현의 대마를 잡았다. 얼른 자기 집만 세어보니 1백집 근처. 바둑판은 361집이고 놓인 돌과 자기 집을 계산하니 상대 집은 세 볼 필요도 없었다. 무조건 이겼다고 툭툭 두다가 계가하니 져도 한참 졌다. 사석의 존재를 빼먹은 것인데 이 엉터리 계가법은 훗날 ‘김희중 계가법’이라 명명됐다.

▲ 77년 김인 八단이 제3기 기왕전 도전자로 나서 김희중 五단을 3-0으로 꺾고 기왕에 올랐다.

이러한 민란과도 같은 춘추전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인은 77년 김희중을 3-0으로 꺾고 기왕 타이틀을 따냈지만 이듬해 다시 김희중의 도전을 받아 타이틀을 내주었다. 동시에 최후의 보루였던 패왕마저 조훈현에게 넘겨주면서 무관의 야인 신세가 된다.

김인에서 조훈현으로 패권이 넘어가던 시기, 거기엔 처절함이나 일진일퇴의 극적인 드라마 같은 것은 없었다. 김인은 강진, 조훈현은 영암, 말하자면 동향 선후배 사이인데 둘의 승부에는 다른 사람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둘만의 교감이 관류(貫流)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바둑평론가 노승일의 관전기 일부를 소개한다. 

“김인 八단과 조훈현 七단. 두 사람이 대국할 때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조 七단과 서봉수 五단의 대국 분위기와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따뜻함이었다. 상대방이 잘 두면 잘 둘수록 뭔지 고맙고 든든한 그런 관계, 승부 자체보다 더욱 커다란 신뢰의 안개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

▲ 7연패 후 73년 하찬석 五단에게 왕위 자리를 넘겼던 김인 五단이 그 이듬해 도전자로 나서 하찬석 五단을 3-2로 누르고 왕위에 복귀했다.


승부란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내가 쓰러지는 것. 차갑고 살벌하다. 그런 세상에서 따뜻한 훈풍이 분다는 것은 실로 의외다. 김인의 인품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남들은 평생 바둑공부를 해도 1급에 도달하기 힘든데 아홉 살 만에 프로기사가 된 조훈현은 관철동에서 분명 이채로운 존재였다. 이 빛나는 원석을 갈고 닦아준 사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각별한 애정으로 돌봐준 기사는 김인과 작고한 정창현 七단이었다.

이학진 선생(작고. 1911~2009)은 김인이 프로 입단하기 전 스승 역할을 했던 한국바둑 초창기 거인 중 한 분이다. 조훈현의 선친과는 친구 관계이기도 해서 조훈현도 이 분에게 무척 많이 배웠다고 한다. 이런 관계에서 본다면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형제간이나 다름없었다. 

일본 유학 시절 조훈현은 세고에 문하였지만 기타니 도장에도 자주 놀러갔다. 김인이 기타니 도장에서 개구쟁이 조치훈이나 고바야시 등을 지도할 때였다. 그 전 한국에서도 조훈현을 보면 수시로 지도대국을 해줬는데 이국에서 다시 만났으니 감회가 어땠을까. 김인은 10살 아래의 조훈현이 올 때마다 무릎에 앉히고선 열과 성을 다해 복기를 해줬다.   

▲ 조훈현이 도전자로 나서 화제가 됐던 74년 제14기 최고위전 도전기. 김인 七단이 0-3으로 패퇴하며 최고위를 조훈현에게 넘겼다.


▲ 김인(강진)은 고향 후배 조훈현(영암)에게 타이틀을 넘기면서도 종종 등산을 같이했다. 사진은 마등령 정상에서 조훈현과 함께. 

이런 사이다 보니 나중에 조훈현과 타이틀전을 벌이면서도, 그럴 때마다 벨트를 풀어줘야 하는 입장이면서도 김인은 조훈현을 대동하고 전국의 산을 누볐다.

북한산과 설악산이 특히 두 사람이 좋아하던 곳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기풍 뿐 아니라 성격에서 걸음걸이까지 두 사람이 정반대라 할 만큼 대조적이라는 것. 김인이 그토록 즐기는 술을 조훈현은 단 한 방울도 못 마신다. 남자끼리 마음을 주고받으려면 반드시 술이 필요하다는 통설을 이 두 거인은 뒤집어 버렸다.

# “그때 좀 더 치열했어야 했다”
김인의 전성시대가 짧았던 것은 그의 담백한 승부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쉽게 말해 비정하고 모질지 못했다. 80수, 90수 무렵에도 둘 맛이 나지 않으면 미련 없이 돌을 던졌다. 상대방이 더 놀랐다. 타이틀을 잃었다. 

관철동 시대는 ‘프로기사=천직(天職)’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시대였다. 천직개념이란 “죽을 때까지 프로기사를 하겠다. 성적이 안 좋아도 아무 상관없다.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할 뿐.”이라는 정도로 요약되는데, 이런 태도는 기도(棋道)를 중시하는 일본바둑의 영향과 관철동 시대의 풍토가 어우러져 형성됐다.

당연히 승부를 위해서 하게 되는 행위(반칙은 아니지만, 승리를 위한 구질구질해 보이는 가일수, 손님 실수 바라는 행위)는 정도에 어긋나거나 비겁한 행위로 비쳤다. 천직개념의 다른 말은 낭만이었다.    

‘오늘날 바둑의 승부가 비정하고 가혹해졌다고 하지만, 술이나 시나 철학 등은 승부에 해악이 될 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바둑의 본질에 맞지 않는 것이다. 기계처럼 단련하고 세상사를 잊어버린 채 승리만을 추구해 이기는 게 바둑이라면,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바둑의 기술자와 바둑의 고수는 다른 것이다.’ 김인은 전성기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바둑에다 인생관을 그대로 투사하고자 했다. 허망하게 신기루를 좆는 일이 될지언정 거기서 무언가를 찾으려 애썼다. 당연히 모든 대국이 진지했다. 

바둑은 실력의 세계. 제1인자가 추구하는 것은 곧 바둑계 전체가 추구하는 것이 된다. 그의 산처럼 중후(重厚)한 기풍은 바둑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바둑이란 것은 두터워야 제대로구나!” “저런 자세로 바둑을 둬야 1인자가 되는 거구나!”

▲ 90년대 중반 조서유이 4인방이 버티고 있는 한국바둑은 단체전 역시 최강이었다. 94년 제3회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 시상식에서 우승트로피를 받고 있는 김인 단장.

애기가들의 안목이 이런 점에 쏠리자 바둑을 대하는 인식도 크게 달라졌다. 척박한 삶 속에서 바둑이 주는 유장함과 두터움을 통해 위안을 얻고자 하는 바람이 사회적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과 순수의 시대는 70년대 중반 이후 차디찬 실력주의의 광풍이 불어 닥치면서 이내 설 곳을 잃어버리게 된다. 스포츠로 따지면 ‘실력 없는 선수가 왜 그라운드에 아직도 있느냐’는 질문이 등장한 것이다.  

김인 九단이 이때를 바둑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시절로 기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국수 타이틀을 딴 후 10여 년이 내 전성기였다”며 “돌아보면 그때 좀 더 치열하게 정진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털어놨다. “주변에서 추어주다 보니 부담도 컸고, 그러다가 편하게 안주해 버린 거지요. 그런 면에서 나는 진정한 고수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 낭만의 표상...“이건 국보급입니다”
1945년부터 지금에 이르는 우리의 현대바둑사에서 가장 신명났던 시절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조남철부터 김인, 조훈현, 서봉수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바둑의 세 세대가 한데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했다. 영토 분쟁에 뛰어든 군웅 중에는 절대강자도 절대약자도 없었다. 모두가 제1인자의 야망을 꿈꾸고 있었다. 조훈현이 한강 다리를 넘어오기 전이었다.

각축은 치열했지만 낭만이 있었다. 인간미가 있었고 유머도 있었다. 타이틀 하나를 가져봐야 가난한 것엔 변함이 없었다. 명예는 높았으나 부(富)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다. 승자는 얼마 안 되는 상금을 툭툭 털어 잔치를 벌였다. 이기면 이겨서 마셨고, 지면 져서 마셨다. 낮에는 바둑돌로 싸웠고, 밤에는 술잔과 입으로 싸웠다. 사방에 술내음이 진동했다.

속기의 명수 김희중은 타이틀전이 끝나자마자 동료들과 미아리 술집골목의 첫집부터 마지막까지 훑었다. 새벽에 집에 갈 때는 버스비 몇 닢만 달랑거렸다. 서울법대 출신의 홍종현은 12월의 엄동설한에 포장마차에서 술을 실컷 마신 다음 술값 대신 웃옷을 척 벗었다. 돈은 없어도 술은 마셔야지 하며 와이셔츠만 걸친 채 추운 밤거리를 씩씩하게 걸어갔다. 


 

▲ 87년 김인 九단이 제4기 박카스배 결승에 진출했으나 강훈 七단에게 1-3으로 패퇴했다.

김인은 이를테면 이런 주당파의 당수격이었다. 총각이었고, 주머니 사정도 남들보단 좋았다.  무엇보다 술을 좋아했고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주당 중에 헤비급으로 통하는 신언철 二단(작고)이나 심종식 七단(작고), 유건재 八단 등과 수시로 관철동 여관방의 벽을 술병으로 둘러 채웠다.

양도 양이지만 김인 국수는 예나 지금이나 술을 멋있게 마신다. 평소 과묵한 그도 술이 들어가면 어릴 적 일본 유학시절부터 시작해 좀처럼 듣기 어려운 자신의 얘기를 술술 풀어낸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고고한 선비의 고담준론을 대하는 듯 품위마저 느껴진다. 주변에 문인, 시인, 기자, 학생, 기인재사(奇人才士) 등이 넘쳐났던 이유다.

특히 타이틀 최종국을 둘 때엔 기사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끝난 다음에 술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1년에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금의 반 이상을 술자리에서 풀었다. 동료가 안 보이면 “아무개 어디 갔나?”하고 찾았다. 그러기에 너나없이 곁으로 몰려들었다. 

관철동의 ‘찌개집’은 그가 자주 간 술집 겸 식당이다. 비가 오면 천장이 새는 함석지붕에 간판도 없는 허름한 집이었다. 그냥 아무 찌개나 시켜도 잘 끓여준다고 해서 그렇게 통했다. 관철동의 디오게네스 민병산 선생이나 자칭 7류 소설가 강홍규, 환속 승려 김성동 등이 으레 거기서 저녁때면 모였다. 김인은 밤늦게 대국이 끝나면 그곳에 가 계산부터 한 다음 자리에 합류했다.

가끔은 까만 얼굴의 천상병이 비척거리며 나타나 “천원!”하며 손을 벌렸다. 두 손바닥 밖에 가진 게 없는 천상병이었지만 나름 원칙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겐 오백원이었지만 김인만은 특별히(?) 천원이었다. 하루는 김인이 “나도 이제 국수이니 2천원을 주겠다.”고 말했다. 천상병의 다음 말이 걸작이었다.

“김인아, 너는 아직 천원짜리야!”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둘이 크게 박장대소를 했다고 전해진다. 

김인 국수가 이렇듯 매일같이 폭음을 하다 보니 주변에서 건강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친한 후배 박치문이 강권하다시피 해서 혜화동의 서울대 병원으로 간수치를 체크하러 갔다. 안 좋은 결과가 나올까봐 무척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한데 의사의 반응이 전혀 뜻밖이었다. 김 국수의 얼굴을 보면서 거의 존경한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간은 태어나서 처음 봤습니다. 이건 국보급입니다. 천연기념물로 박물관에 모셔야 해요.”

김인 국수는 술만 잘 산 게 아니었다. 누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그냥 줬고(물론 돌려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후배기사가 “승단판입니다” 하면 말없이 져 줬다. 간혹 동료기사가 안 좋은 일로 형사 사건에 휘말리면 아는 법조인을 총동원해 구명을 하느라 애를 썼다. 주변 동료나 후배기사들 가운데 이런 저런 이유로 그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김인은 헤프거나 낭비벽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낭만적이고 정을 잃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런 풍경은 뒷날엔 사라졌다. 70년대 후반부터는 승부가 낭만을 앞서는 소위 실력주의 시대가 들어섰다.

▲ 김인 국수의 고향 전남 강진에서 매년 김인국수배 국제시니어바둑대회가 열린다. 사진은 지난해 열린 12회 대회 시상식 모습.

# ‘만다라’, ‘국수’...김성동과의 인연 
‘한국기원은 이상한 동네였다. 건물은 이후락 씨가 지었으나 이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박정희 씨나 이후락 씨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월간『바둑』지는 심재탁 씨나 성유보 씨 같은 해직기자들의 임시 피난처 역할을 했다. 요즘 명상에 몰두하고 있는 소설가 송기원은 『바둑』지의 고참이었고, 잿빛 장삼을 펄럭거리며 나타났던 해맑은 학승 김성동은 역시 『바둑』지가 세속에서 맞이한 첫 직장이었다.’ -박치문의 <관철동 시대(1997)>에서

47년생으로 김인보다 네 살 아래인 김성동은 이력부터가 특별했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강1급의 기력이던 김성동은 산사에 의탁해 입산수도하는 시절에도 프로기사에의 꿈을 버리지 못해 승복을 걸친 채로 입단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77년 환속 후 월간『바둑』의 기자로 입사했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나가서는 ‘만다라’를 썼고 ‘만다라’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아, 그 김성동이가 그렇게 유명해질 줄 누가 알았어.” 김인 국수는 요즘도 술잔을 기울일 때면 그때의 스토리를 외우듯 반복하곤 한다.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그 옛날 질곡의 지대를 포효하며 술과 아픔을 달래던 문인들은 대개 고인이 되었거나 관철동을 떠났다. 아직도 살아 있고 연락이 닿는 사람은 아마도 김성동이 유일할 것이다. 

수년 전 교통사고로 뇌경색 전조 증상을 보이며 칩거에 들어갔던 김성동은 지난해 27년 만에 소설 ‘국수(國手)’를 탈고했다. 1991년 11월 1일 문화일보 창간호부터 2년간 연재되었던 소설을 마침내 5권 장편으로 출간한 것이다. 국수는 지난 여름 출간되자마자 문재인 대통령이 여름휴가 때 읽은 것으로 소문나며 유명세를 탔는데, 알고 보니 이 책의 제자(題字)를 쓴 사람이 김인 국수였다.

“성동이 하고는 못 만난 지가 꽤 됐는데 책이 나오기 몇 달 전 갑자기 우리 집을 찾아온 거야. 그러더니 다짜고짜로 지필묵과 화선지를 내놓고선 국수(國手)를 써보래. 오랜 만에 쓰는 것이기도 하고, 아무리 해도 글씨가 잘 안 되지 뭐야. 한참을 헤매는 걸 보더니 이 친구가 뭐라는지 알아? ‘형님, 다 집어치고 소주나 하자’는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 마셔대기 시작했지. 그러다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다시 뭔가를 쓰긴 쓴 것 같은데 갑자기 이 친구가 ‘이겁니다!’ ‘됐습니다!’ 하더니 빼앗듯 한 장을 들고선 뒤도 안돌아보고 사라지는 거야. 하하, 그 때나 지금이나 그 친구 참 엉터리야, 엉터리.”

▲ 김성동의 소설책 ‘국수’. 제자를 김인 국수가 썼다.

# 청산(靑山) 60년...“아직은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  
김인은 40세가 되던 1983년 九단으로 승단했다. 조훈현에 이은 九단 2호였다. 승단에는 턱없이 무심했던 김인이었지만 그래도 이것은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九단 승단을 전후한 시기인 82~83년, 김인은 2년 연속 국수, 왕위 등 4개 기전의 본선에 진출하며 ‘회광반조(回光返照)’의 기미를 보였다. 나아가 86년엔 박카스배 결승에 진출하면서  10년 만의 타이틀 복귀에 대한 기대를 한껏 모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자신처럼 술을 좋아하는 14살 아래의 강훈 七단에게 1대3으로 패퇴하면서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이듬해 44세 늦은 나이에 김인은 등산으로 교제하던 13살 연하의 신부를 맞아들이며 길었던 총각 시대를 끝낸다. 현재 슬하에 장성한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국보급 간을 지니고 있지만 술에는 당할 수 없었는지 2000년대 초반 위암 수술을 받아 위의 상당부분을 절개했다. 그 뒤로 한동안 술을 끊었다가 몇 년 전부턴 다시 술잔을 입에 대고 있다. 한동안 와인이나 청하 같은 약한 술로 바꾼 적도 있지만 체질에 맞았을 리 없다. 지금은 다시 소주이고 곁의 안주엔 예나 지금이나 손이 가는 법이 없다. 당연히 집에선 비상이 걸렸다. 

지난해 프로생활 60주년을 맞았다. 기사 생활 60년은 조남철 九단의 58년을 넘어선 국내 최장 현역 기록이다. 처음 바둑을 접한 시기부터 계산하면, 70년 세월을 바둑과 함께 했다. 오랜만에 여러 신문과 인터뷰도 했다. 심경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실 승부사를 떠나면 프로기사직을 은퇴하는 게 맞다고 본다. 하지만 은퇴하고 난 뒤 바둑계와 연이 점점 끊어지는 게 싫었다. 아직은 바둑 동네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

최근엔 시니어리그 대회장을 맡아 시합이 열리는 날 후배들과 반주 겸 한잔하는 것이 큰 소일거리가 됐다. 매년 가을 고향서 열리는 김인국수배에 내려가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일일이 맞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연례행사가 됐다. 자신의 이름을 딴 기념관을 만든다든지, 자서전이나 대국집을 내는 일 따위엔 여전히 턱없이 무심하다.

생애 통산전적은 860승 5무 703패(승률 54.8%). 전성기 90%에 육박했던 승률이 이렇게 된 것은 인생 후반에 패점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2015년 이후엔 공식대국을 하지 않고 있다.

김인 국수는 조남철 선생이 비운 자리를 홀로 지키고 있는 한국바둑사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어른이다. 그의 삶은 바둑으로 치면 외길수순과 같았다. 삶이 곧 바둑이었지만 그는 바둑과 삶의 안온함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국수의 대명사로 추앙받았지만 그의 살림살이는 역대 국수 중 가장 넉넉하지 못했다.

지난달 한국기원에 행사가 있어 오랜만에 김인 국수를 뵈었다. 지난해 김인 국수는 술로 인해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다. 걱정이 돼서 “요즘은 안 하시는 거죠?”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손을 내저으며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 나왔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술은 해야지. 이미 올 들어서도 몇 차례 했는걸.” 

김인 국수가 태산처럼 우리 곁에 오래오래 함께 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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