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 - 제1편 조남철(上)
‘바둑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2018년 11월 5일, 한국기원은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을 선정 발표했다. 본 특별기획에서는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고(故)조남철 선생을 비롯해 바닥이던 한국바둑을 세계최강으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김인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등 한국바둑의 거장 7인의 삶과 업적을 총 14회(국수 1인당 2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대국수(大國手) 조남철
-그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됐다
■글 _ 안성문(바둑리그 전문기자)
조남철(1923~2006)
-1923년 전라북도 부안 출생. 한국인 최초의 일본기원 바둑 프로기사
-1945년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 설립
-1956년~1964년 국수전 9연패
-1984년 한국기원 명예 이사장, 일본기원으로부터 오쿠라상 수상
-1989년 은관문화훈장
-2006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대국수’ 헌정
국수란 어떤 사람일까. 이 시대의 우리에게 국수는 어떤 의미일까.
‘국수(國手)’는 바둑과 소리, 악기, 무예, 글씨, 그림 등 나라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나 일인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사전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경지에 올랐다고 다 국수일까.
진정한 국수란 거기에 더해서 시대의 애환과 더불어 감동을 주고, 뭔가 애잔함이라고 할까, 깨달음이라고 할까, 그런 것까지도 함축적으로 이따금씩 보여준 사람들이 아닐까. 그 점에서 조남철은 국수 중의 국수, 그야말로 대국수였다.
조남철은 1923년 11월 30일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생년을 보면 알 수 있듯 일제강점기, 8.15 광복, 한국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桎梏)을 모두 겪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격변에서도 바둑외길을 걸어왔다. 한국전쟁 때 피난보따리에 생필품이 아닌 기보를 챙겨 다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없었다면 한국바둑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추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남철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은 온전히 한국바둑이 걸어온 역사이다. 그는 척박한 땅에 현대바둑의 심짓불을 놓았다. 나아가 그 심짓불이 꺼지지 않도록 생의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몸을 바쳤다. 그의 몸으로 한국바둑이 자양분을 얻었고, 그의 피로 한국바둑의 혈맥이 돌았다. 모든 것이 그로부터 시작됐고, 모든 것이 그에게서 나왔다.
▲ 1968년 관철동에 거대한 한국기원 건물이 들어섰다. 조남철은 축사를 하다가 기어이 눈물을 보였다. 해방되던 해 남산동에 한성기원 간판을 건 뒤 거듭된 재정난으로 무려 16회나 셋방을 전전했던 ‘중앙(中央)기원’. 그것은 조남철의 땀과 눈물로 세워 올린 보금자리였다. 한국기원은 1994년 지금의 홍익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며 소설과도 같은 숱한 스토리들을 만들어낸다.
“여긴가?”
특유의 쉰듯하면서도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선생이 물었다. 녹화를 위해 도착한 선생을 마중나간 자리에서였다. 가벼운 회색 정장에 올백으로 넘긴 백발, 볼은 움푹 파였고 이마엔 주름이 깊었다. 72세의 나이. 원체 마른 체구인 데다가 머리는 하얗고 다리는 더 가늘어져 선생은 땅을 딛고 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선생은 조금 휘청거리는 여덟팔 자 걸음으로 방송국 문을 향해 갔다.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어떤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학(鶴)이었다. 그렇다, 지금 생각해도 학이었다. 선생은 땅 위를 걷는 것이 아니었다. 휘휘 날개를 저으며 미끄러지듯 물살 위를 가는 것처럼 보였다. 중천의 태양이 그런 선생의 은발에 부딪혀 유난스러운 반짝거림을 토해내고 있었다.
1995년 늦여름이었다. 서울역 맞은편, 커다란 대우빌딩의 뒤켠에 위치한 4층짜리 작은 빌딩이었다. 그곳 지하 1층의 스튜디오에서 바둑TV는 12월의 개국을 앞두고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었다. 세계 최초의 바둑전문방송. 주위의 큰 관심과 기대 속에 태어난 바둑TV였지만 막상 현장의 상황은 열악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개국을 앞둔 방송국들이 필수적으로 거치는 것이 있다. 시험방송이란 것을 통해 자체 역량을 점검해보는 일이 그것이다. 말이 시험방송이지 몇 개의 송출지역을 정해놓고 정확한 시간에 제작물을 내보내야 했으니 긴장도는 실제 방송을 뺨쳤다.
하지만 당장의 급선무는 스튜디오부터 확보하는 일이었다. 방송국이 들어설 목동의 스튜디오는 여름 내내 공사 중이었다. 급한 대로 당시 한국기원 이사장이었던 현재현 회장이 대우그룹 김우중 총재에게 부탁해 대우의 영화채널(DCN) 스튜디오를 빌렸다. 그나마 해당 채널의 제작이 없는 때만 짬짬이 사용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의욕은 대단해서 제법 거창한 걸로 시험방송을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정확한 프로그램명은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를테면 ‘국수 열전’ 같은 것이었다. 한국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선생부터 시작해 김인, 하찬석, 조훈현 등 역대 국수들을 스튜디오에 불러 그 시절의 얘기와 생애의 바둑을 복기하는 걸로 구성을 짰다. 선생은 그 첫 녹화의 주인공으로 방송국을 찾은 것이었다.
▲ 1955년 제1회 한·중(대만) 바둑대회에서 대승을 거둔 한국선수단이 여의도공항에 개선했다. 왼쪽부터 장국원 初단, 김봉선 二단, 윤유중 단장, 민영현 二단, 조남철 四단.
“바둑으로 월급 받으면 최고지”
스튜디오에 들어선 선생은 의자에 앉자마자 양복 안쪽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A4 크기의 용지 서너 장. 종이마다 여백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글씨가 빼곡했다. 한 눈에 봐도 꽤나 정성을 들인 필체였다. “며칠 동안 옛날 자료를 찾아 봤지. 요즘은 기억이 영 서툴러서 말이야.” 선생이 푸근한 웃음으로 제작진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막상 녹화가 시작되자 크고 작은 온갖 사고가 터졌다. 제작진 모두가 서툴렀던 시절이었다. 하다못해 바둑판 뒤에 붙여 놓은 음향 마이크까지 툭하면 떨어지면서 속을 썩였다. 그때마다 녹화는 중단되었고, 선생은 수도 없이 스튜디오를 나갔다가 준비가 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72세의 노구였다. 짜증을 내거나 불호령을 내린다 해도 하나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조용했다. 조금의 불만도 내색 않고 힘든 시간을 묵묵히 참아냈다. 오히려 “처음엔 다 그런 법이지, 허허”하고 웃거나 “이 참에 담배나 한 대 피고 오면 되겠구먼”하는 말로 우리를 위로하려 들었다. 모두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녹화가 끝났으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오후 5시 무렵, 2시간으로 예정된 녹화가 장장 4시간을 넘어갈 즈음에 마침내 결정적인 사고가 터졌다. 방송 장비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올스톱된 것이었다. 오후 내내 고생한 것이 다 날아가서 아무 소용이 없게 됐다. 장비야 고치면 된다지만 문제는 선생이었다. 종일 고생한 보람도 없이 다음날 다시 나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죄인이 따로 없었다. 선생을 택시정류장으로 모시는 그 짧은 시간에도 등줄기엔 땀이 비오듯 흘렀다. “다시 오지, 뭐”하며 방송국을 나섰던 선생의 침묵이 천근의 무게로 가슴을 짓눌렀다. 얼마 후 택시 하나가 다가왔다.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때였다. 도통 말이 없던 선생이 툭 던지듯 한마디를 물었다. “자네 월급은 받나?”
뜻밖의 질문이었다. 직장이 있으면 월급은 당연한 것 아닌가. 마뜩찮은 얼굴로 “네….”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 사이 택시가 도착했다. 얼른 뒤로 가서 문을 열어드렸다. 선생은 파묻히듯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그때였다. 선생이 나를 다시 쳐다본 것은. 그리고는 지금도, 아니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바둑으로 월급 받으면 최고지.”
▲ 83년 조남철 九단의 입신축하연. 63년 八단으로 승단한지 꼭 20년만에 최고단에 올라 조훈현 九단에 이어 국내 두번째 九단이 됐다.
“왜 우리는 못 살까”
“그때 왜 이런 생각이 들데요. ‘왜 우리는 이렇게 못 사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그때 제가 느낀 것은 ‘우리나라에는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가 없구나. 전문가가 부족하구나’ 이런 생각이 들데요. ‘그렇다면 바둑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 나는 바둑의 전문가다.’ 그래서 바둑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을 한 거죠.” -생전 KBS와의 인터뷰에서
1945년 광복을 맞은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얼마나 기다렸던 해방인가. 거리는 환희와 감격의 물결로 넘쳐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막상 조남철의 가슴은 막막했다. 스물두 살의 나이. 할 줄 아는 거라곤 일본에서 배워 온 바둑뿐인데 이 바둑이 조국 건설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며칠 낮밤에 걸쳐 고민이 이어졌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가지가 가지를 쳤지만 종국에는 ‘왜 우리는 일본보다 못 사는가?’ 하는 화두가 허연 뼈대를 드러냈다. 나라가 잘 살려면 각 분야에 전문가들이 많이 나와 줘야 한다. 남들이 학문을 전공해서, 스포츠맨이 되어, 군인으로서 조국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듯 나는 바둑을 전공해 프로기사가 되었으니 어떻게든 바둑을 통해 나라에 보은하자. 기도보국(棋道報國). 조남철의 일생을 관통한 기치는 이때,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전문가란 무엇인가. 기술이나 예술, 기타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전문가다. 하지만 그게 다인가. 실체적으로 전문가는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생계가 가능한 사람을 말한다. 속말로 ‘먹고 살 수 있어야’ 전문가다. 그래야 전문가라고 말할 자격이 있고, 그래야 사람들로부터 대접도 받는다. 이런 이유로 선생은 기도보국의 첫 과제이자 핵심 목표로 ‘전문가(전문기사) 만들기’에 두 팔을 걷어 붙였다.
▲ 한국 최초의 국수전 창설을 기념하여 조남철(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을 비롯한 프로기사들과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동아일보 지면에 백지기보를 넣고 라디오로 생중계를 시도한 권오철 씨(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도 보인다.
“저기 노름꾼 대장 간다”
하지만 꿈같은 얘기였다. 해방 직후였다. 바둑 인구는 따지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선생은 “당시 바둑 팬은 남쪽에 2000명 정도나 되었을까” 라고 의문했고, 작고한 신호열(한학자·프로 二단) 선생은 “읍, 군 같은 지역에는 바둑판 하나 변변한 게 없었다.”고 탄식했다.
기도보국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세운 조남철이었지만 눈앞의 현실은 암담하다 못해 참담했다. 변변한 바둑돌, 바둑판 하나가 없어서 철수하는 일본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통사정을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렇게 겨우 겨우 마련한 것이 불과 7조의 바둑세트.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조남철은 서둘러 남산 기슭에 기원의 현판을 내걸었다. 그때가 1945년 11월 5일. 이름은 서울을 뜻하는 ‘한성기원’ 으로 정했다. 이후 16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던 고난의 시작이었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고 느꼈을 때 6.25가 터졌다.
“시커먼 잿구덩이 속에서 바둑알을 찾으며 조남철은 마치 불에 타 죽은 자식을 붙들고 오열하는 아비처럼 참담한 심정이었다.”
조남철 회고록의 한 구절이다. 바둑판을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간신히 세운 한국기원이 6·25의 전란 속에서 엉망이 된 모습을 보며 조남철은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일어섰다. 전쟁터에 나가 상이용사로 제대한 뒤 신문사마다 쫓아다니며 구걸하다시피 프로기전을 만들었고 오늘의 기반을 닦았다. 이리하여 조남철이란 이름 석 자는 바둑 하면 떠오르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는 자신의 칼럼(일인자)에서 조남철을 이렇게 기술했다.
생전에 선생이 틈만 나면 했던 얘기가 있다.
“수표교 다리 옆을 지나가면 말이야. 아줌마들이 쉬쉬하며 ‘저기 노름꾼 대장 간다’고 말하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
50년 전의 이 일을 선생은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말했다. 얼마나 가슴에 응어리지고 한 맺힌 기억이었을까. 전쟁이 끝나고 꽤 오랫동안 선생은 주변의 이런 인식과도 싸워야 했다.
여기서 선생이 “바둑으로 월급 받으면 최고지”라고 한 말이 이해가 간다. 노름꾼에게 월급 같은 것은 없다. 월급은 정당하게 생활인으로 인정받을 때 나온다. 받쳐주는 팬과 스폰서가 있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나아가 월급을 줄 수 있는 조직은 어느 정도 영속성을 기대해도 된다. 그래서 선생은 모든 질문을 뒤로 한 채 딱 하나만 물었을 것이다. “월급을 받냐”고.
▲ 62년 김인의 도일 이후 한국의 기재들이 줄줄이 일본유학에 올랐다. 사진은 69년 조남철이 일본에서 유학중인 윤기현, 윤희율, 조치훈, 조훈현, 하찬석을 함께 만난 장면.
“조남철이 와도 안 돼!” 바둑의 대명사가 되다
이름은 고유명사이다. 그런데 어느 한 분야에서 대성하여 국민의 인정을 받게 되면 흔히 이름 뒤에 ‘~이’가 붙는다. 선생의 이름 역시 일반명사화 했다. 잡은 대마를 두고 “조남철이가 와도 못 살린다”고 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선생은 60년대를 넘어 70년대 초까지 바둑의 대명사였다.
한국 현대바둑의 여명기를 지나 발흥하기까지 선생이 우리 바둑사에 남긴 빛나는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 중요한 몇몇을 추려보았다.
# <22세> 그야말로 맨손이었다
조남철이 ‘기도보국’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한성기원의 간판을 걸었을 때 그가 가진 것은 바둑판과 돌 7조밖에 없었다. 기원의 터였던 남산동 가옥은 건물주이자 의사인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시설과 규모는 기원이라기보다 바둑 회원들의 사랑방 수준이었다. 회비와 지도료로는 운영비가 부족해 4명의 임원들이 사비를 털어 충당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한성기원을 설립하며 조남철은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을 분명히 했다. 한성기원의 설립일인 11월 5일이 ‘바둑의 날’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① 국제시합에 대비하여 순장바둑을 폐지하고 현대바둑으로 대체한다.
② 내기바둑을 금하고 건전한 국민오락으로 보급한다.
③ 장차 일본기원과 같은,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기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듬해 여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건물주가 집을 비워 달라고 했고, 당장 갈 곳이 없는 한성기원은 지금의 경복궁역 부근, 적선동으로 첫 번째 이사를 떠난다.
▲ 96년 삼성화재배 창설 조인식에서 축사하고 있는 조남철 선생.
# <23세> 소주 대 아스피린
7년간의 일본 유학 끝에 한국 최초의 전문기사 면장을 손에 쥔 조남철이 1944년 귀국한다. 본격 바둑 보급에 나선 그는 노국수들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자세를 취했다. 바둑이 더 이상 사랑방 소일거리로 머물지 않고 건전한 대중오락으로 격상되기 위해 그것은 반드시 겪어야 할 통과의례였다.
조남철이 이끄는 조선기원과 노국수 중심의 경성기원 간의 대립 속에 양측이 뒤섞인 리그전이 열렸다. 대회 준비로 동분서주하던 남철은 몸살로 열이 펄펄 끓는 상태에서 불의의 1패를 당했다. 다음 상대는 노국수들의 암묵적 밀어주기 속에 전승을 달리던 민중식. 그는 대국이 시작되자 “술이 없으면 수가 안 보인다”며 소주를 꺼내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새카만 후배의 기를 죽이려는 의도였다. 남철은 혼미함 속에서도 아스피린 두 알을 구해 냉수에 타 마신 뒤 필사적으로 싸웠고 승리했다(출처: 조선일보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연재 칼럼 인용).
# <32세> “자네들은 어째서 왜놈바둑을 두고 있는가?”
1955년 봄, 조남철은 당시 실세였던 장경근의 도움을 받아 경무대로 들어갔다. 대만에서 열리는 최초의 국제교류전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시간 정도의 시범대국이 끝났을 때 노(老) 대통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그런데 자네들은 어째서 왜놈바둑을 두고 있는가?”
주위가 얼음장처럼 변한 상황에서 조남철의 기지가 발휘됐다. “바둑이 본래 창시되었을 때는 지금처럼 반상에 아무 것도 놓지 않은 상태에서 두었다.”는 말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
조남철은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순장바둑을 한 판 더 둔 뒤에야 무사히 경무대를 나올 수 있었다.
▲ 98년 제3회 삼성화재배 32강전에서 중국의 위빈 九단과 대국하고 있는 조남철 선생. 대국을 절제해오던 선생은 삼성화재 측 와일드카드 요구를 몇 번 고사 끝에 받아들였다.
# <33세> 국수전... ‘한 번 국수는 영원한 국수’의 시작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대만을 다녀온 이듬해인 1956년, 조남철은 동아일보와 함께 국내 최초 기전인 국수전(당시 국수 제1위전)을 창설했다. 초창기 대회명이 ‘국수 제1위전’이었던 것은 당시 노국수들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함이었다. 조남철은 이 대회에서 9연패를 이룩하는 등 적수 없는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상금과 관련된 일화도 있다. 국수전은 62년 7기까지 우승 상금이 5000원이었다. 주변에 우승 턱을 내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는 항의했다. “10만원이 아니면 국수를 반납하겠소.” 조남철이 출전하지 않는 기전은 의미가 없었다. 신문사 측에서 약속했다. “8·9기엔 열 배인 5만원으로, 10기부터는 스무 배인 10만원으로 올리겠소.” 9연패 기록을 세웠던 그였지만 정작 10기에선 김인 五단(당시)에게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 뒷날 그가 웃었다. “그게 세상살이지.”
# <39세> 강해지려면 대해로 나아가라... 도일(渡日) 러시
1962년 제6기 국수전에서 스무 살의 도전자 김인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조남철에게 1승1무3패로 패퇴한다. 실력 부족을 절감한 김인은 도전기가 끝난 직후인 3월에 큰 세상을 맛보겠다며 일본으로 떠났다.
조남철에 이은 2번째 유학이자 광복 후 1호였다. 이를 계기로 너도 나도 일본으로 떠나는 붐이 일었다. 같은 달 조상연이, 그해 8월에는 여섯 살의 조치훈이 조남철의 손을 잡고 현해탄을 건넌다. 1962년 9세의 최연소 입단에 성공한 조훈현은 이듬해 10월, 하찬석이 12월로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은 조훈현(세고에)을 빼고는 모두 기타니 도장의 일원이 됐다. 뜨거웠던 도일 행렬은 1968년 약간 늦은 나이의 윤기현이 가노 요시노리 문하로 들어가면서 끝이 났다. 이후는 서봉수 같은 국산 ‘토종’들의 시대였다.
# <71세> “승단은 해서 뭐 해”
바둑계 개척 시대의 조남철은 후배들과의 실력 차가 너무 커 오히려 빠른 승단을 기피했다. 七단 시절 “아직 승단까지 몇 판 더 남아 있다”는 직원의 말에 안심하고(?) 이겨가다 “계산을 잘못했다. 승단하셨다”는 통보와 함께 八단으로 오르기도 했다. 바둑에 관한 한 모든 것이 ‘1호’였던 조남철이 조훈현에 이어 九단 2호로 머문 사연이다(출처: 조선일보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연재 칼럼 인용).
“기생이 되어라”
선생은 1994년 71세 때 세계 최고령 본선(18기 국기전)의 기록을 세운 후 1999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승부를 떠난 후에도 선생은 이따금씩 한국기원에 나와 프로기전의 개막식 축사 같은 것을 했다. 한국기원의 명예이사장 자격이었다.
연설 레퍼토리의 주제는 늘 ‘기생론(妓生論)’이었다. 선생이 말하는 기생은 흔히 생각하는, 그저 술이나 따르는 기생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엄격하게 예도와 법도를 배우고 일평생 고객을 위해 헌신하는 일본의 게이샤 같은 존재를 의미했다.
기사들의 반응은 반반이던 걸로 기억한다. 귀담아 듣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또 저 소리야?” “우리가 어떻게 프로가 됐는데 기생이 되라니.” 진절머리를 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보다 못한 제자들이 “선생님, 이제 그만 좀 하시죠.” 어렵게 청을 드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선생은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기생이 나쁜 것이냐? 생각해 봐라. 누가 우리에게 돈을 주냐, 하느님이 주냐? 바로 팬들 아니냐. 그런 팬들을 지극 정성으로 모셔도 모자랄 판에 요즘 거만들을 떠는 게 눈에 보여서 하는 소리다. 힘든 시절을 벌써 다 잊은 게냐?”
“봉고차를 빌려줄 수 있겠나”
위와 같은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90년대 후반의 어느 날이었다. 일이 있어 한국기원 4층의 기사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선생을 뵙게 되었다. 한 눈에도 기력이 쇠잔한 모습이었지만 정신은 또렷한 듯 필자와의 몇 년 전 일을 단번에 기억해냈다.
“지금도 바둑테레비에 있다구? 그렇다면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봉고차를 빌려줄 수 있겠나.”
“네? 봉고차요? 필요하시다면 중계차라도 낼 수 있습니다만….”
“아닐세, 봉고차 정도면 충분하네. 뒤에다 해설판하고 바둑판 몇 개 실으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야.”
난데없이 봉고차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내일 모래면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디를 가신다는 걸까. 바둑판은 그렇다치고 해설판은 왜 필요한 걸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잠자코 하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필자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은 듯 잠시 허공을 보고 있던 선생이 “허허, 그게 말이야” 자세를 고쳐 잡으며 얘기를 이어갔다.
“실은 건강이 좀 나아지면 강원도 산골이나 외딴 섬이나 그런 데를 가보려고 해. 조훈현이나 이창호 있지 않은가? 그런 재주를 가진 아이가 저 멀리 어딘가에서 내가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섭외? 형식?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그저 발 닿는 대로 다닐 거야. 장소는 초등학교 운동장 같은 데가 좋겠지. 넓직한 데다 뛰노는 아이들도 있을 테니까. 그런데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바둑을 가르칠 거야. 바둑이 얼마나 좋은 건지 말해줄 거야.”
아쉽게도 선생은 마지막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2006년, 8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후배, 제자들이 금연을 권하면 “바둑에는 잔수가 있지만 인생에는 묘수가 없어” 하며 피우고 싶은 걸 피우며 유유자적하게 살다 가겠다고 말했던 선생이었다.
승(勝)보다 패(敗)가 더 많았던 사연
해방 후 질곡의 시대를 관통하며 기적처럼 한국바둑의 꽃을 피운 송원(松垣, 조남철의 호). 그의 생애에서 유독 눈에 뜨이는 기록은 460승486패라는 통산전적이다. 승률 48%이니 두 사람이 두어 한쪽은 반드시 지고 한쪽은 이기는 확률에 비춰 보자면 ‘평균’에 가깝다.
으레 ‘천하무적’으로 기억되는 선생의 생애 통산전적이 이렇게 된 것은 인생 후반부의 대국 성적 때문이다. 선생은 1972년 서른 살 아래 후배 서봉수 九단에게 명인위를 빼앗긴 뒤 다시는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광을 뒤로한 은퇴 같은 것은 그의 생애에 없었다. 오히려 고희를 넘긴 1994년 국기전에 나서 ‘최고령 본선 진출’이라는 또 다른 기록을 남겼다. 생애 마지막 날까지 그의 직업은 프로기사였다.
산소 호스를 착용할 만큼 불편한 몸으로도 문병객이 찾아올 때마다 바둑계 걱정만 했다고 한다. 깡마른 체구로 담배를 꼬나문 채 “엣다 모르겠다”하며 반상을 강타하던 젊은 날의 송원. 그의 벽력같던 착점은 지금도 천상의 기원을 울리고 있지 않을까.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