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번외편 유창혁(上)
특별기획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 - 번외편 유창혁(上)
‘바둑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2018년 11월 5일, 한국기원은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을 선정 발표했다. 본 특별기획에서는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고(故)조남철 선생을 비롯해 바닥이던 한국바둑을 세계최강으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김인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등 한국바둑의 거장 7인의 삶과 업적을 총 14회(국수 1인당 2회)에 걸쳐 연재했다. 한국 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유창혁 九단의 번외편을 마지막으로 특별기획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화려강맥(華麗剛脈)의 큰 바둑 유창혁
■글 _ 안성문(바둑리그 전문기자)
사람도 바둑도 밝았다. 칙칙한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종합적으로 ‘인상’을 말하자면 화사했다. 바둑도 흑을 들었을 때보다 백을 들었을 때가 한결 멋지고 폼이 났다.
전성기 땐 호리호리한 체격에 해맑은 용모, 강력한 공격바둑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시스터 보이 같은 외모지만 탁월한 무예를 지닌 것이 당시 유행하던 고우영의 만화 ‘의적 일지매’의 주인공과 닮았다 해서 ‘일지매(一枝梅)’로 불리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스타였지만 정작 입단은 늦어 18세가 돼서야 했다. 프로 입문 이후엔 조훈현과 서봉수를 반반씩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출신 배경과 성장과정은 서봉수, 바둑의 속성과 품격에선 조훈현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공격’ 분야에서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고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담대하고 통 큰 기질을 반영하듯 큰 승부에 강했다. 국내에선 최고 상금이 걸린 기성전과 왕위전에서 활약했으며, 나아가 국내기전 보단 국제기전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결과 93년 후지쓰배를 시작으로 2002년 LG배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모든 세계대회를 제패하는(그랜드슬램) 위업을 이창호보다 먼저 달성했다. 국수전과는 유독 인연이 닿지 않았지만 최대 타이틀인 왕위전을 4연패하며 이창호의 천하통일을 막아냈다.
유창혁(1966~)
- 1966년 서울 출생
- 1979년 어린이 국수전 3연패, 학초배 아마대회 우승
- 1984년 세계아마바둑 선수권 준우승 후 프로 입단(18세)
- 1988년 조훈현 九단을 꺾고 대왕전 우승
- 1990년 기성전, 1992년 왕위전 우승(이후 4연패)
- 1993년 후지쓰배 우승. 바둑문화상 최우수기사상
- 1997년 제3회 잉창치배 우승(대 요다 노리모토 3-1)
- 2000년 삼성화재배 우승, 2001년 춘란배 우승
- 2002년 LG배 우승으로 ‘세계대회 그랜드슬램’ 달성(최초)
- 2016년 전자랜드배 ‘한국바둑의 전설’ 우승
- 2014~2016년 바둑 국가대표 감독. 이후 2018년까지 한국기원 사무총장 역임.
- 2019년 한중일 세계시니어 바둑대회 우승
<통산 타이틀 획득 26회. 세계대회 8회 우승. 최우수기사상 1회>
타고난 끼와 송곳 같은 재주, 그리고 전투력. 유창혁은 이를테면 진흙 속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피어난 연꽃이었다. 작고한 이광구(바둑평론가) 선배는 생전에 이창호와 유창혁에 대해 말할 때마다 그것을 항시 신기해 했다. 어떻게 그런 유창혁에게서 봄날의 훈향이 느껴지고 식물원 속에서 피어난 이창호에게선 우울한 동굴의 메아리가 들려오는 것이냐고. 사람의 지혜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오묘한 조화라고.
유창혁은 1966년 4월 25일 서울 회현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서울이 고향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다. 태어나서 얼마 안 있어 한 살 때 대전으로 이사를 가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 유년 시절의 거의 전부를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실제 고향은 대전인 셈이다.
형제가 많았다. 위로 누나가 셋, 형이 하나, 밑으로 남동생, 여동생이 있다. 7남매 중 다섯째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아버지 유희범 씨(2016년 작고)는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는 발명가였다. 발명특허를 얻은 것도 가짓수가 제법 됐다. 그러나 어느 하나 돈과 연결된 것은 없었고 따라서 집안 형편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발명가의 아들. 그의 특출난 재주와 연관 지어 그것을 물어볼 때마다 유창혁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아버지를 닮은 바가 별로 없다. 아버지는 별별 희한한 재주를 다 갖고 있었지만 그에 비한다면 나는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겸손만은 아니다. 실제로 유창혁은 바둑을 빼면 지극히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배가 자주 고팠다”는 것 말고는 특별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 유희범 씨는 바둑 초보였다. 10급 수준이었다. 바둑에 대한 남다른 이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들의 바둑수업을 밀어줄 여력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심심풀이 상대역을 만든다는 기분이었을 텐데 결과적으로 유창혁에게 바둑을 가르친 것은 부친의 발명품 중 최고의 작품, 걸작으로 남게 됐다.
#원조 ‘어린 왕자’
바둑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아버지였지만 어린 유창혁의 중요한 바둑교사 역할을 한 사람은 어머니 추길자 씨였다. 어머니는 바둑의 문외한이었으나 문외한치고는 실로 가상한 교육방법을 찾아냈다. 신문에 실리는 프로기사들의 실전대국보를 암기하도록 시킨 것이다.
고수들의 대국보를 외우는 것은 족보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방법이다. 초심자라도 고수들의 명국 10국을 외워 각각 10번을 혼자 복기할 수 있으면 1급(아마3단)이 된다는 ‘설’도 있다. 논리적 근거가 박약한 소리라고 일소에 부쳐도 그만이지만 생각해보면 일리가 아주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유창혁이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실력을 키웠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가위로 오린 기보를 보고 또 보며 바둑의 깊이를 느꼈다”는 유창혁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밖으로 삐져나오듯 빼어난 재능은 절로 드러나게 돼있다는 뜻이다. 무사독학에 변변한 바둑책 하나를 보지 못했음에도 유창혁의 바둑실력은 죽순처럼 뻗어나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 또래에서는 이미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린이국수전에서 우승하면서 중앙 무대에 진출, 이후 3연패를 하면서 미완의 대기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선배 어린이 국수로는 조대현, 최규병(현 프로 九단) 등이 있다.
유창혁이란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은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충암학원이 바둑 명문의 기치를 내걸고 전국의 기재(棋才)를 모으던 때였다. 어린이국수전을 우승한 이듬해 아들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오자 유창혁의 부모는 온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고, 유창혁은 자연스럽게 ‘충암’의 일원이 됐다. 이어 2년 뒤인 79년, 유창혁은 초등학교 6학년의 신분으로 제6회 학초배쟁탈 전국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온 바둑계를 충격에 빠뜨린다. 학초배는 지방에서 주최하는 대회지만 전통이 있는 전국규모대회. 유창혁의 학초배 우승은 즐비한 아마 강자들의 숲을 뚫고 초등학생이 우승한 최초이면서 최연소 기록이었다(이 기록은 그로부터 18년 뒤인 1997년, 초등학교 5학년인 박영훈이 전국아마십강전에서 우승하면서 비로소 깨진다). 이 무렵 유창혁은 말하자면 바둑계의 어린왕자였던 것이다.
#3년의 공백이 없었더라면
그러나 이후 약 3년간, 정상적이라면 중학교 3년 과정을 마쳐야 했을 시기에 유창혁의 이름은 바둑 언론에서 잠시 모습을 감추게 된다. 유창혁의 바둑 이력서에 빈 칸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며, 유창혁을 아끼는 사람들이 두고두고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한창 때에 3년의 공백은 큰 것이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세계 일류급 프로기사들 가운데 바둑수업시절 3년의 공백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한창 물이 오를 수 있는 시절에 3년간이나 허송세월을 하고서도 당당 일류대열에 동참했다는 것은 유창혁의 기재가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케 하는 척도가 된다.
공백기가 생길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훗날 스스로 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무렵 유창혁은 바둑에 대한 흥미를 잃고 있었다. 주위에 마땅한 적수가 없었던 것이 첫째 원인이었다. 한창 뻗어나갈 나이에 라이벌이 없다는 것, 요즘 흔히 쓰는 말로 하면 바둑 공부에 박차를 가할 인센티브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서울로 이사온 후 부모가 생계 문제로 바빠 그에게 관심을 기울여 줄 시간이 없었던 것도 부차적인 이유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유창혁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 3년의 시간이 꼭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고. 이 말은 진심일 것이다. 사실 아주 나쁜 길로만 빠지지 않는다면 청소년기의 시련, 방황은 긴 인생에서 약이 될 때가 많다. 성공한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충암고 진학을 앞둘 즈음 유창혁은 홀연히 바둑계로 돌아왔다. 긴 방황의 시간을 마치고 바둑돌을 다시 만지자 이전에 없던 열정이 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프로 입단을 목표로 뒀다.
84년 봄, 고교 2년생인 유창혁은 국가대표선수로 제6회 세계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준우승의 전적을 올렸다. 한국 선수로는 역대 최고의 성적이었다. 또한 현실은 준우승이었지만 실제로는 우승이나 다름없었던 ‘우승성 준우승’이었다. 준결승의 성격이었던 일본의 4천왕 히라다 7단과의 대국에서 압승을 거두자 당시 대회 관계자들과 선수들은 이 시스터보이 같은 한국소년의 괴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중국의 왕군(王群·현 프로 八단). 결과는 아쉽게도 끝내기 실수로 인한 대역전패였다. 어쨌거나 세계대회 준우승을 안고 귀국한 유창혁은 그 해 여름 여세를 몰아 논스톱으로 프로에 골인한다. 75년 어린이 국수에 오른 지 9년 만의 일. 사람들은 유창혁의 기재로 본다면 최소한 5년은 지각한 것이라며 아까워했다.
#16년 만의 대혁명
프로 저단 시절 유창혁의 성적표에서 돋보이는 것은 86년 월간 『바둑』이 주최한 ‘조훈현 대 신풍3총사 (조대현·양재호·유창혁) 치수고치기 특별 9번기’(일명 ‘탐험 대결’)에서 당대의 일인자 조 九단에게 3연승을 올린 기록이다.
비록 비공식 기전이었고 치수도 호선이 아닌 정선이었지만 당시 유창혁의 3연승은 ‘모종의 시그널’, ‘변화의 단초’ 같은 그 무엇으로 바둑팬들에게 깊고 신선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방위 복무로 잠깐 재충전의 시기를 보낸 다음 2년 뒤인 88년, 마침내 제6기 대왕전에서 유창혁이 도전자의 신분으로 조훈현 왕국의 성문을 두드렸다. 입단 4년차, 단위는 三단이었다.
88년 겨울이면 이창호가 슬슬 스승의 권좌를 넘겨다보기 시작할 무렵이다. 조 九단 입장에선 그렇잖아도 어린 제자 때문에 골치가 좀 아파 오려 하는 판에 하나가 더 나타난 것이었다. “2년 전 일도 그렇고 이번엔 혼을 좀 내줘야겠군” 그렇게 마음먹은 것이 오히려 자충수의 결과로 나타났다.
도전5번기의 결과는 3대1, 유창혁의 승리였다. 한국기원은 벌집을 쑤셔놓은 모양이 됐고 월간 『바둑』은 16년 만의 대혁명이라는 표제를 내걸었다. 72년 서봉수의 명인쟁취 이후 16년 만에 나타난 저단자의 쿠데타였다. 88년이면 조 九단이 세계사적 사건, 제1회 잉창치배를 우승하기 바로 1년 전이다. 만 35세의 나이였지만 위세가 중천에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여전할 때였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유창혁의 타이틀 획득은 ‘지는 해’ 조남철로부터 서봉수가 명인을 쟁취한 것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쾌거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유창혁 사건’은 그 의의와 충격의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값하는 각광을 받지는 못했다. 유창혁이 몰고 온 회오리바람, 그 센세이션은 몇 달을 지속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지만 뜻밖에 더 큰 뉴스의 파도 속에 묻혀 버렸다. 잉창치배와 후지쓰배. 바로 이 해에 경쟁적으로 시작한 양대 세계대회가 쏟아내는 화제와 뉴스에 아쉽게도 인기차트에 장시간 머물러 있지 못했던 것이다.
#체질과 맞아 떨어진 생존 방식, ‘큰 승부’
‘대왕’에 오를 때 유창혁은 三단에 불과했지만 주위로부터는 “九단이 되고도 남는 실력”이라는 말을 들었다. 九단 격 三단이었다. 그런데도 유창혁은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조훈현은 왕년에 한창 기세가 오를 때 31연승을 올린 적이 있다. 이창호는 90년도에 국내기전에서 무려 41연승을 기록했다. 그런데 유창혁에겐 그런 기록이 없다. 물론 승률은 좋았지만 신기록 같은 것을 양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유창혁은 심심찮게 질 만한 상대가 아닌 사람에게 졌다. 무명의 신예기사에게도 졌고 성적을 전혀 못 내고 있는 원로급 기사에게도 졌다. 컨디션이 좋고 기세를 탈 때는 천하의 누구라도 이길 것 같은데 한 번 핀트가 어긋나면 속절없이 무너지는 일이 반복됐다. 바둑 언론에선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유창혁’이란 말로 점잖게 포장해줬지만 사실 이 말은 ‘누구한테나 이기고 누구한테나 질 수 있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유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체력설’. 어려서 이창호처럼 잘 먹고 잘 자라지 못한 것이 문제라는 얘기였다. 여기에 유창혁이 아마추어로 체류한 기간이 너무 길어 불쑥불쑥 손이 나온다는 ‘경솔설’에서부터 어려서 총애를 받아 우월의식 또는 자만심 같은 것이 생겼다는 얘기까지. 이 모두가 나름대로 조금씩 일리가 있는 말들이었지만, 그의 태도나 체력이 아닌 승부방식을 놓고 제대로 설득력 있게 제시된 견해는 최종적으로 이런 것이었다.
“유창혁은 승부의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타입이다. 바둑이 끝난 후 누가 몇 집을 이기고 졌느냐를 따지기보다 바둑의 내용으로 상대를 압도하려 한다. 그런데…”
“유창혁은 상대가 좀 약하다 싶으면 승부를 겨루는 일에 신명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즉, 상대가 누구나 인정하는 강자일 때 신명이 난다는 얘기인데 이것은 유창혁이 큰 승부에 강하다는 지적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큰 승부란 당연히 대국료 또는 상금이 많은 승부를 뜻하는 것으로 예선보다는 본선, 본선 보다는 도전기가 된다. 본선 진출국이나 타이틀 결정국 같은 것은 더 이를 나위가 없다. 실제로 유창혁 본인도 “승부가 커질수록 긴장이 되기는커녕 신이 난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는데, 사실 이 말은 조훈현이나 이창호를 상대로 나름의 생존 방식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여서는 승산이 없는 만큼 소수의 영양가 있는 목표에 집중한다는 것. 이 점에서도 유창혁은 서봉수를 닮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서봉수가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점점 기회를 잃어갔던데 반해 유창혁은 20대 중반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그런 궤적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는 것. 타고난 반전무인(盤前無人)에 대담무쌍한 유창혁의 스타일이 큰 승부일수록 빛을 발했다는 것.
#‘6자와의 인연’, 최대 타이틀 기성 획득
90년 정초 유창혁은 국내 최대 타이틀인 기성(棋聖) 초대 왕관을 놓고 조훈현과 결승7번기를 벌였다. 결과는 유창혁의 2승4패. 그러나 곧바로 1년 뒤 다시 도전해 4승1무1패로 타이틀을 쟁취했다. 상금 규모 국내 랭킹 1위 타이틀의 주인이 됐다. 프로 입문 후 6년이 지나서의 일이다. 여기서 1무승부는 한 판이 무효(소위 ‘백두산 대국’으로 이에 대해선 자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는 만큼 설명을 피한다)로 처리된 데서 생겨난 것이다.
사연이야 어찌됐건 유창혁이 기성을 획득하자 그와 ‘6’자와의 인연이 한동안 크게 화제가 됐다. 66년생으로 6회 학초배에서 우승했고, 6기 세계아마대회에서 준우승했으며, 6기 ‘대왕’으로 첫 타이틀을 삼았고, 프로 입문 6년 만에 최고 타이틀을 차지했으니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막힌 인연이었다.
유창혁이 ‘기성’을 쟁취함으로써 국내 바둑계에선 한때 누가 과연 제일인자냐는 것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여전히 타이틀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조훈현이냐, 상금 총액에서 앞선(타이틀 수는 적지만) 이창호냐, 아니면 가장 큰 타이틀을 차지한 유창혁이냐 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관례를 따른다면 큰 타이틀 순이므로 유창혁이 제일인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당시 우리에겐 아직 그런 명문규정이 없었다.
그거야 어찌 됐든 유창혁이 기성에 오르자 주변에서는 역시 큰 승부에 강한 유창혁이라면서 유창혁이 내친김에 타이틀 행진을 시작할 거라고 기대했다. 여세를 몰아 타이틀 한 두 개쯤은 추가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 92년 5월 27일 막을 내린 26기 왕위전 도전7번기 최종국에서 유창혁 五단이 이창호 五단에게 승리하며 3개월 만에 무관 탈출에 성공했다.
#이창호와의 만남
91년 초여름, 유창혁은 마침내 타이틀 무대에서 이창호와 상봉했다. 제8기 박카스배 결승 5번기. 제1국은 이창호가 이긴 가운데 제2, 3국의 대국 장소는 멀리 태국의 파타야 해변으로 결정됐다.
파타야는 아름다운 해변을 끼고 있는 천혜의 휴양도시였다. 방콕에서 동남방, 버스로 2시간 반의 거리, 바닷물은 알맞게 따뜻했으며 백사장은 석회를 물에 개어 발라놓은 것처럼 부드럽고 미끄러웠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해변의 결투에서 유창혁은 패했고 끝내는 3연패로 완봉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손에 땀을 쥐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결과. 유창혁은 타이틀 경쟁에서는 이창호를 한발 앞질렀지만 이창호와 최초로 맞대결한 타이틀매치에서는 지고 만 것이다.
이후 유창혁은 잠시 재충전의 기간을 가졌다가 91년 겨울 기성전에서 조훈현의 도전을 받아 수성에 실패했고, 계속해서 왕위전에선 도전자 신분으로 이창호와 다시 만났다. 7번기였다. 첫 판은 불꽃 튀는 타격전 끝에 통쾌히 승리, 그러나 2, 3국에서 연패해 1승2패.
위기였다. 내용적으로도 제2국은 바둑을 거의 끝내놓고도 당한 역전패. 제3국에서도 정도는 좀 약했지만 2국의 전철을 되풀이했다. 시종 80∼90점짜리 착점으로 일관하는 이창호에 비해 백점짜리도 뒀다가 70점, 60점짜리도 두고 가끔은 터무니없는 실수도 하는 유창혁이 이기기란 힘들 것 같다는 얘기가 기정사실처럼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어진 4국과 5국에선 이런 예측이 크게 빗나갔다. 유창혁은 계백처럼 결사적인 강수와 사생결단의 직선공격으로 밀어붙였고, 소년 이창호는 강태공처럼 기다리다가 연속 패배를 맞았다.
스코어는 드디어 3대 3. 화창하던 5월에 7번 승부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기세를 탄 유창혁의 맹공이 일찌감치 불을 뿜었다. 여름햇살처럼 눈부시고도 강렬한 기운이 화살처럼 이창호의 방패를 꿰뚫었다. 흑 3집반승. 모든 기전에서 일패도지하던 유창혁은 갑자기 돌아서더니 막강한 이창호 군단을 깨뜨리고 4대 3으로 타이틀을 따냈다. 공전의 명승부였고, 유창혁의 본령인 ‘공격’이 유감없이 발휘된 승부였다. 승리한 유창혁에겐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유창혁은 이렇게 극적으로 부활했다. 그리고 이후 조훈현-이창호-조훈현으로 이어지는 사제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면서 4년이나 왕위를 지켜냈다. 유창혁이 ‘유왕위’로 불리게 된 이유다.
도무지 빈틈이라곤 없어보였던 이창호를 무찌른 92년은 유창혁 바둑인생에서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26세,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절정의 나이. 목표는 이제 국내를 벗어나 더 넓고 큰 무대가 돼야 했다. 더할 나위 없는 자신감으로 기회를 노리던 유창혁에게 때마침 이듬해(93년) 세계 4대기전이 한꺼번에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