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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제21기 맥심커피배 챔피언 이지현 

등록일 2020.07.07861


커버스토리 / 제21기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챔피언 이지현

입신최강전 ‘게임 체인저’ 이지현


군 입대를 앞둔 이지현(28) 九단이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챔피언에 오르는 이변 아닌 이변을 연출했다. 사실 입신최강전 개막 전만 하더라도 이지현의 우승을 점치는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대회 2연패에 도전하는 신진서와 네 번째 우승에 출사표를 올린 박정환 등 쟁쟁한 입신 32명이 자리한 개막 석상에서 이지현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서 살짝 비껴나 있던 이지현은 마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거북이가 슬금슬금 전진을 계속하듯 앞으로 앞으로를 외친 끝에 정상을 밟았다.

박영훈과의 첫 경기를 기분 좋게 장식한 이지현은 홍민표·최정 등 그동안 상대전적에서 앞섰던 기사들과의 만남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진 나현과의 준결승에서 잡은 행운은 이지현의 우승을 예감케 했다.

패배 일보 직전까지 갔던 바둑을 역전하는 뒷심을 발휘한 것과 함께, 건너편 조에서 랭킹 1위 신진서가 신민준에게 덜미를 잡혀 탈락한 것도 이지현의 마음을 가볍게 했다. 신진서에겐 상대전적에서 8연패 포함, 1승8패를 기록 중이었던데 반해 결승에서 맞붙은 신민준과는 2승2패의 전적도 전적이지만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리그전에서 몇 차례 승리한 것이 자신감으로 이어졌고 결국 결승에서 신민준을 2-0으로 물리쳤다. 6월 8일 해군 입대를 앞두고 2020년 본인의 마지막 공식 대국을 멋지게 마무리했다.

▲ 맥심커피배 결승3번기는 예상을 뒤엎고 2-0 이지현 九단의 완승으로 막을 내렸다.



이번 우승은 2018년 국수산맥 국내프로토너먼트 우승 이후 공식 기전 두 번째 우승이다. 당시 랭킹에서 앞선 변상일을 꺾고 입신에 오르면서 지난 20기 대회부터 맥심커피배 출전권을 손에 얻었다.

지난 대회 16강 진출 이후 두 번째 출전 만에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이지현은 입신최강전의 당당한 ‘게임 체인저’임을 입증했다.  


 - 맥심커피배 우승으로 군 입대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린 기분일 것 같습니다.
결승에 들어가기 전부터 긴장을 많이 했는데 이번 우승으로 마음의 짐을 던 것 같아 홀가분합니다. 시기적으로도 군 입대 전 마지막 대회였고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후회 없이 두자고 마음먹었던 게 주효했던 것 같아요. 아무튼 입대 전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 우승까지의 과정을 돌이켜본다면 어떠셨나요. 결승전은 예상 외로 2-0 승리를 거뒀습니다.
처음부터 기대한 건 아닙니다만 대진표가 나온 순간 반대편 조에 상대적으로 강자들이 몰렸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잘 준비하면 기회가 오겠다 싶어 한판 한판 최선을 다 했습니다. 첫 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바둑리그(수려한합천)에서 한솥밥을 먹던 박영훈 사범님을 만났습니다.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어 어려웠지만, 결과적으로 첫 판을 이긴 게 상승세로 연결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준결승에서 만난 나현과의 경기에선 바둑 내용도 어려웠고 초읽기에 몰려 서로 정신없이 두었던 것만 기억납니다. 쉽게 우세를 잡을 수 있는 장면이 몇 차례 나왔지만, 기회를 놓치며 어려운 승부를 펼친 것 같아 아쉬움도 조금 남습니다. 결승 때는 반집으로 승부가 갈린 1국이 승패를 좌우했던 것 같습니다. 민준이도 승리할 수 있는 찬스가 있었으니깐요. 2국 때는 민준이의 착각이 있어 싱겁게 승부가 결정됐지만 돌이켜보면 준결승 역전승이 우승까지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10년 전 내신 1위로 입단했습니다. 연구생 내신 1위면 공부 잘 하는 모범생 이미지가 떠오릅니다만.
입단하기 전 프로들과 스파링을 많이 가졌습니다. 실력이 탄탄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입단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원성진·허영호·홍성지 사범님과 많은 실전을 가졌는데 거의 한 판을 이기지 못 했던 것 같아요. ‘프로들은 정말 강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 아마추어 시절에도 세계대회 본선에서 승리하는 등 화려한 성적으로 주목받았습니다.
2009년 1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이었던 것 같은데요. 당시 본선 64강에서 중국 신인왕이었던 스웨에게 승리하며 본선 32강에 올랐습니다. 대국 전에는 상대가 강한 기사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중국 프로에게 한 수 배울 수 있다는 기분으로 임해 좋은 결과가 나왔던 것 같습니다. 다음 대국에선 중국의 퍄오원야오를 만났는데 긴장도 많이 한데다 새롭게 만들어진 ‘포인트 입단’을 의식해 제 실력을 발휘 못 한 채 패했던 게 생각나네요.

- 2010년 입단 후 바로 다음해 천원전 4강, 그 다음해 명인전 4강 등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래도 번번히 4강 문턱에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앞섭니다. 입단 1년 만인 2011년 천원전 4강에 올라 최철한 사범님에게 패했고, 2012년 명인전에서 백홍석 사범님에게 졌어요. 특히 2015년 쓰라린 기억이 많이 나는데요. 국수전에서 이세돌 사범님, 렛츠런파크배에서 김명훈에게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바둑을 놓친 것이 많이 아팠습니다.  

- 九단 승단이 확정된 직후 인터뷰를 보니 입신최강전에 출전할 수 있어 좋다는 대목이 보이던데요, 우승까지 했습니다. 
九단들만 나올 수 있는 상징적인 대회여서 더욱 출전하고 싶지 않았나 싶습니다. 국수산맥 국내 부문에서 우승해 九단이 됐지만 국제 부문이 별도로 있어 메이저 대회 우승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다만 그때까지 4강에서 많이 패하곤 했는데 첫 결승 진출이어서 자신감이 많이 생긴 건 사실입니다.



- 국내 랭킹 1, 2위인 신진서, 박정환을 빼면 누구한테도 자신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랬던가요^^. 국가대표 리그에서 두 선수를 제외하면 상대전적에서 밀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 실력을 100퍼센트 발휘만 하면요. 진서한테는 꽤 밀렸지만 정환이한테는 자체 연습 바둑에서 몇 번 이겨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 국내대회 성적에 비해 메이저 세계대회 성적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LG배 두 차례(2015년 20회 16강ㆍ2019년 24회 32강), 몽백합배 한 차례(2017년 3회 64강) 본선 진출 기록이 보입니다만, 삼성화재배와 농심신라면배에선 아직 본선 무대와 인연을 맺지 못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예대회인 오카게배에서는 12승4패로 활약했습니다만, 이지현 九단을 좋아하는 팬들은 이 정도 성적으로 만족하지 못 하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중국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허리층도 두껍고 조금만 방심하면 떨어지기도 해서요, 더 잘 해야겠다는 부담감이 더해져 실력 발휘를 못 했던 것 같습니다. 멘탈적으로 더 강해져야겠죠. 2018년과 19년 2년 연속 농심신라면배 국내선발전 최종전에서 패했을 땐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도 긍정적인 편이라 패한 당일은 괴롭지만 다음날 잘 잊어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운동을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풉니다. 농구를 많이 좋아하는 편이라 강훈 형, 박준석, 박종훈, 나현 하고 많이 하곤 했습니다.  

- 평상시 바둑 공부는 주로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궁금합니다. 전투 바둑을 선호한다는 얘길 들었는데, 본인의 기풍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지난 4월까지 4년 넘게 국가대표 활동을 하면서 자체리그전을 포함한 여러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지냈던 기억이 눈에 선합니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저도 인공지능을 많이 활용합니다. 한큐바둑 ‘절예’와 ‘릴라제로’, 국대리그에서는 ‘카타고’도 사용하고요, 한·중 기사들과 인터넷바둑을 통해 실전감각 유지에 힘썼습니다. 기풍이랄 것까진 없는데 예전엔 무모할 정도로 대마 공격을 좋아했다면 지금은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형세판단이 조금 약한 데다 예전 습관을 버리긴 힘들어 국면은 주로 전투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 동료들 중 특히 친하게 지내는 단짝은 누군가요?
92년 동갑내기인데다 장수영 도장에서 함께 수학한 안국현, 박경근하고 친하게 지냅니다. 강훈 형하고는 농구하면서 많이 친해졌고요.
 
- 입대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스물여덟이면 많이 늦은 편인데 고민이 많을 것 같습니다.
6월 8일 해군에 입대해 22개월 동안 군 복무를 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전문기사로서 공백 기간 동안 제 실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실전 감각은 문제가 없을지 등 현실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그래도 남들 다 하는데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여러 방면에 두루 관심이 많고 운동을 좋아하는 이지현은 틈틈이 자기계발서를 보면서 바둑 외적인 분야와도 소통을 자주 한다. 맥심커피배 결승2국 승리를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생국(人生局)이었다고 밝힌 이지현은 가족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했다.

“대구에서 지역 연구생을 준비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이주했습니다. 저를 위해 아버지는 대구에서 교사직을 그만두고 가족 모두가 상경했고 부모님은 자영업을 하면서 저를 뒷바라지 해 주셨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다음해 대한생명배 어린이국수전에서 우승했고 내신 1위로 입단할 때까지 바둑에 올인 했던 것 같습니다. 입단 후 국내대회 성적에 비해 세계대회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 했던 것 같은데 우선 군 복무를 잘 마쳐야겠죠. 제대하고 세계대회 본선에서 더 많은 활약을 펼쳐 저를 응원해주시는 팬 여러분, 부모님, 고향 대구의 여러 고마운 분들께 조금이나마 보은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군 복무 잘 마치고 늠름한 모습으로 팬들 앞에 다시 설 것을 약속드립니다. 필승∼.


기억의 편린 하나.

이지현은 2018년 5회 오카게배 국제신예대항전 출국을 앞두고 공항에서 선수들과 잠시 떨어져 분주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이가 꽉 찬 군 미필자라 출국하려면 써야 할 서류도 많고 병무청 신고를 필해야 했던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갔다를 반복하면서 한참이 지난 후 탑승 직전 선수단에 합류했다. 이지현의 얼굴에 비친 미안한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성실한 청년의 한 단면을 본 것 같아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글/차영구 편집장, 사진/이시용 작가>

▲ 5월 12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맥심커피배 시상식 장면. 왼쪽부터 최상인 동서식품 상무, 이지현 九단, 신민준 九단, 양재호 한국기원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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