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 라이벌 열전① 김지석 VS 강동윤
반상 라이벌 열전①
김지석 VS 강동윤
■글 _ 이홍렬(조선일보 바둑전문기자 겸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관전필자)
라이벌을 어떻게 정의(定義)할 수 있을까.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 ” 표준국어대사전의 라이벌에 대한 풀이다. 하지만 한 가지 빠졌다. 동시대에 살면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상승상부(相勝相負) 해야 라이벌이다.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넬슨(1758~1805) 제독은 동업자 관계지만 둘을 라이벌로 짝지어 부르는 사람은 없다.
모태 라이벌
강동윤과 김지석에겐 신통하리만치 닮은 점이 많다. 경력 실적 재능 인품으로 모자라 출생 연도까지 같다. 1989년 1월 강동윤이 먼저 세상에 나왔고, 6개월 뒤 “바둑 중흥의 무거운 짐을 동윤이에게만 지게 할 수는 없다”며 김지석이 태어났다. 라이벌이라고 하면 대개 대립 또는 적대시(敵對視) 하는 구도가 떠오르는데 이들 사이는 진짜로 우정이 철철 넘친다. 이 대목에서도 둘은 진정한 라이벌의 자격을 갖췄다. ‘모태(母胎) 라이벌’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만 4살, 우리 나이로 5살 때 바둑돌을 처음 잡은 것, 어린 나이 때부터 발군의 기재를 드러낸 것도 판박이다. 우선 김지석. 그 무렵 이미 한글을 읽었던 지석은 바둑에서도 천재성을 번뜩여 6살에 TV에 소개됐다. 뒤이어 거목 조훈현의 내제자로 들어갈 뻔 했던 사건은 유명하다. 가족들은 지석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막내의 바둑 공부를 위해 전남 광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한다. 강동윤은 아버지(당시 5급) 손을 잡고 3살 위 형(3급)이 다니는 바둑학원에 갔던 것이 평생 운명을 결정했다.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주변을 석권해가자 신동이 출현했다고 떠들썩했다.
하지만 세상사란 그렇게 쉽게 ‘다음 한 수’가 결정되지 않는 모양이다. 두 천재소년은 초등 3년 무렵 인생 항로를 놓고 나란히 결정적 고비를 맞는다. 강동윤의 회상. “크고 작은 대회서 몇 살 형들을 꺾고 우승하자 주변 칭찬은 쏟아지는데, 이게 과연 내가 가야할 길이 맞는지 헷갈리더라.” 동윤은 여기서 일단 바둑을 중단하고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다.
상경해 고(故) 임선근 사범을 2년 간 사사한 지석도 3학년 때 광주로 되돌아갔다. “바둑이란 게임에 큰 재미를 붙이지 못한 시절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좀 지겹게 느껴지곤 했다.”(김지석)
동윤은 칩거 석 달 만에 오리온배에 출전했다. 하던대로 그냥 신청했던 건데, 머리 하나는 더 큰 형들을 모조리 제치고 또 우승했다. 가족들은 동윤의 ‘습관적 우승’을 계속 바둑으로 정진하라는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지석도 비슷하다. 99년도에 이붕배서 고근태를 누르고 우승한 그는 광주 회귀 2년 만인 초등 5학년 때 또 한 번 서울로 유턴, 본격적으로 바둑 수업에 들어갔다. 같은 시기, 같은 고민이었다는 점에서 전율마저 느껴진다.
저학년 때 김지석, 고학년 때는 강동윤이 석권
초등학교 시절 누가 더 강했을까. 저학년(1~2학년) 때는 김지석, 고학년(5~6학년) 무렵엔 강동윤이 더 셌다. 이 부분은 둘의 증언이 일치한다. 초등 6년간 메이저급 어린이 대회 우승 횟수가 동윤 6회, 지석은 2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 무렵 둘 간의 맞대결은 이뤄지지 않았다.
“지석이는 초등 저학년 시절 유명한 강자였다. 우승 횟수가 적은 것은 지방 거주 기간이 많아 대회에 자주 못 나왔기 때문이다.”(강동윤)
“내가 초등 4년 때 몇 차례 우승한 것은 연구생 5조 이상은 외부 대회 출전을 불허하는 규정 덕분이었다. 동윤이는 이미 1군 멤버였고 나는 거기 들지 못했다.”(김지석)
초등학교 바둑계를 함께 휘젓던 양웅이 당대 최고의 프로양성 도장이던 권갑용 도장에서 재회한 것은 운명적이다. 양천(김종수·김동엽), 화랑도장(김종수)을 거친 동윤이 한 발 먼저 옮겨왔고 광주에서 유턴한 김지석이 얼마 뒤 전입신고를 했다. 둘 모두 5학년 시절이었다. 실력 차를 감안해 제한시간을 동윤은 짧게, 지석은 길게 하는 방식으로 연습바둑을 두기도 했다. 다툰 기억도 있다. 김지석은 “무슨 일인지는 기억 안 나는데 1년가량 서로 틀어져 말도 안하고 지내다 정식으로 화해한 적이 있다”고 했다. 둘 간에 라이벌 의식이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2002년 5월 강동윤이 먼저 프로세계의 코를 뚫었다. 13세 4개월의 중학 1년생 강동윤은 곧바로 한국기원 최연소 소속 기사가 됐다. 김지석은 그보다 1년 7개월 뒤인 2003년 12월 프로 면장을 받아 전문기사 대열에 합류했다. 스타트에 앞선 강동윤은 프로에 들어선 뒤에도 한 동안 김지석보다 앞서갔다. 입단 3년차인 2004년 처음 바둑리거 입성에 이어 이듬해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오스람코리아배 신예연승 최강전 및 SK가스배 신예프로 10걸전을 연거푸 제패했다. 신인답지 않은 무시무시한 질주였다.
프로 진입 후에도 엎치락뒤치락 거듭
둘 간의 프로무대 첫 만남은 김지석이 입단한지 2년 반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김지석은 ‘프로 선배’ 강동윤에게 초기 3연패를 당하는 등 ‘텃세’를 톡톡히 치른다. 김지석이 이 동갑내기 경쟁자를 상대로 처음 ‘판맛’을 본 것은 입단 후 4년이 거의 다 지난 뒤 네 번째 대국 때였다(마스터즈 챔피언십 본선).
두 기사가 나란히 정상급 무대에서 위력을 떨친 1차 시기는 2009년이었다. 2007년 처음 바둑리그 진입에 성공, 예열을 마친 김지석은 2009년 제5기 물가정보배 우승으로 첫 메이저 국내기전 정상에 올랐다. 뒤이어 그 해 바둑리그 MVP에 뽑혔고, 한 해를 결산하는 바둑대상(大賞)에선 다승·승률·연승 등 기록 3개 부문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강동윤의 기세는 더 강했다. 모든 프로기사들의 로망인 세계 제패의 꿈을 먼저 이뤄낸 것이다. 2009년 제22기 후지쓰배 결승서 이창호를 꺾고 정상에 섰다. 강동윤은 그해 박카스배 천원전도 품에 넣으며 국내외 무대를 고루 석권하는 위용을 과시했다. 하지만 2010년을 넘어서면서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번엔 김지석이 농심신라면배 대표로 나가 연속 존재감을 과시한데 이어 2013년엔 국내 2관왕에 오르고, 이듬해 대망의 세계 대회 정상(2014년 삼성화재배)의 꿈을 달성한 것. 그 해 연말 바둑대상의 그랑프리도 김지석의 몫이었다. 강동윤도 만만치 않은 활약을 보였지만 유난히 준우승이 쏟아졌다. 우승은 2013년 원익배 십단전이 유일했다.
흐름에 맞춰 김지석의 강동윤에게 대한 콤플렉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김지석은 강동윤과 2012년 7월부터 2013년 10월까지 15개월 동안 5연승을 기록한다. 초기 맞대결 때 연패로 이어져 오던 상대전적 열세 기록도 여기서 뒤집어졌다. 그러나 강동윤은 이 대목에서 김지석에게 또 한 번 부러움을 안겨준다. 2016년 제20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을 우승한 것이다. 김지석도 2018년 제30회 TV아시아선수권 우승으로 국제대회 2관을 달성했지만, 강동윤의 메이저 2관엔 미치지 못했다.
김지석은 2018년 9월 열린 제1기 용성전을 자존심 회복 무대로 삼았다. 둘 간의 첫 번째 결승 맞대결인 이 대회 승자는 김지석이었다. 결승 기간에 딸까지 얻어 경사가 겹쳤다. 2020년 7월 현재 둘 간의 통산 상대전적은 김지석 기준 18승15패, 승률 54.5%로 약간 앞서 있다. 랭킹에서도 2009년 11월까지 강동윤이 앞서가다 이후엔 김지석이 우위에 서는 등 엎치락뒤치락을 계속 중이다. 7월 현재 김지석이 5위, 강동윤이 7위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에요”
랭킹 그래프에는 지난 날 두 라이벌이 겪어온 굴곡의 여정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20계단 가까이 순위가 벌어지는 경험을 둘이 똑같이 경험했다. 2009년 1월 강동윤이 3위였을 때 김지석은 20위까지 떨어졌다. 김지석은 “당시 나 스스로 느꼈던 충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동윤이와 상관없이 그 순위는 굴욕적이었다”고 했다. 반대로 2017년 11월엔 김지석이 3위, 강동윤은 개인 역대 최저인 22위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 강동윤은 “마음을 집중하지 못해 끝모를 슬럼프에 빠졌던 세월이었다”고 회상했다.
김지석은 사활 등 부분 변화 수읽기에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창작 사활 책을 출간했을 정도다. 이는 상대적으로 전국적 시야가 좁다는 이야기도 된다. 강동윤은 김지석에 대해 “수읽기와 운영 능력이 뛰어나 쉽게 이겨간다. 단점은 가끔 지나친 낙관으로 좋은 바둑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강동윤은 뒤집기에 능한 특이한 기풍. 도저히 수가 안 날 것 같은 곳에서 기막힌 역전 드라마를 이끌어낸다. “동윤이는 승부 감각이 탁월하다. 수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감탄스럽다. 다만 지나치게 버티다가 판을 그르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한다.”(김지석)
강동윤과 달리 김지석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그래도 둘은 이따금 어울린다. 강동윤은 “지난 달 지석이로부터 맛있는 초밥을 얻어먹었다”고 자랑했다. “지석이는 바둑 외에도 외국어 능력 등 다방면에 지식이 많아 부럽다. 남을 배려하는 따듯한 마음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김지석은 “남에게 말 못 할 일이 있어도 동윤이에겐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유머감각이 뛰어난 소중한 친구”라고 말했다.
이창호는 언젠가 “내게 가장 껄끄럽고 매번 힘들게 만드는 상대는 강동윤”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이세돌은 “내 후계자는 아마 김지석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국 바둑의 거대 산맥을 이룬 이창호, 이세돌 두 대가가 일찌감치 손꼽았던 후배 두 사람도 어느덧 서른 고개를 넘겼다. 이 바닥에서 30세 넘어 10위권을 철통같이 유지하는 기사는 손꼽을 만큼 귀하다.
“(박)정환 등장 후 추월당하면서 우리끼리 경쟁할 때가 아니란 걸 느꼈어요. 저절로 동료 의식이 강해지고 서로 응원하게 됐습니다.”(김지석)
“요즘엔 라이벌이란 생각 안 해요. 좋은 일 생기면 서로 문자 보내 축하하고 격려하며 지내죠.”(강동윤)
라이벌은커녕 서로의 팬클럽 회장 같은 관계로 지내는 두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