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피플 | 한국바둑AI연구소 이현호 대표
“AI시대 제2막은 지금부터입니다”
제1막은 무엇일까. 바로 알파고(AlphaGo) 등장이다. 2016년 3월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은 AI시대를 열어젖혔다. 이세돌에게 4:1로 승리한 인공지능은 성장을 지속하며 인간 최고수를 두 점 이상 접는 경지에 이르렀다. 프로기사들은 저마다 집에 신줏단지마냥 고성능컴퓨터 한대씩 모셔놓고 AI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곤 한다. 알파고 이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AI의 등장은 바둑 역사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과제가 남았다. 한국바둑AI연구소 이현호 대표는 지금의 상황을 인류가 컴퓨터를 처음 개발했던 때와 같다고 설명한다. 초기 2진법 전자계산기로 만들어진 컴퓨터 한 대가 첨단과학 시대의 효시가 됐듯, 바둑의 변화는 이제부터라는 것이다.
‘한국바둑AI연구소’가 5월 20일 공식 오픈을 발표했다. 이 연구소는 바둑AI를 개발하는 업체가 아니다. 바둑AI를 바둑 학습과 융합하여 개인 성향에 맞춤 컨설팅을 해준다. 그간 바둑AI는 꾸준히 개발돼왔지만 ‘바둑AI 학습’을 주력 콘텐츠로 내세운 연구소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2021년 5월, AI시대 제2막의 시작을 예고한 한국바둑AI연구소 이현호 대표를 만났다.
- 프로기사 이현호 五단은 익숙한데 ‘대표’란 직함은 낯선 듯합니다.
“저도 아직 적응이 잘 안 됩니다. 퓨처스리거로 활동하며 선수로는 가끔 뵀었는데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되니 쑥스럽네요.”
- AI연구소를 오픈하셨다고요?
“네. 많은 분들이 바둑AI를 개발하는 곳이냐고 물어보시는데, 딥러닝(Deep Learning)을 하는 IT연구소는 아니고요. AI와 분석기법을 접목하여 새로운 바둑 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한 교육 연구소입니다.”
- AI와 분석기법의 접목이요? 어떤 학습법인지 궁금합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바둑AI 프로그램과 대국하고 복기를 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진행하고 있죠. 분명 도움이 되긴 합니다. 초기에는 천하무적이 된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요. AI와 두다 인간과 대결하면 누구든 이길 수 있을 것 같죠. 하지만 금세 현실자각을 하게 됩니다. AI를 흉내내다가도 상대가 한 수만 비틀면 완전히 다른 바둑이 돼버리거든요. 아마 프로기사라면 대다수가 이런 허탈감을 느껴봤을 테고요, 심한 경우 아예 AI를 안 쓰게 되기도 하죠.”
- 왜 이런 현상에 빠지게 되나요?
“시간이 갈수록 AI와 인간 사이의 괴리를 느끼는 겁니다. AI는 바둑을 두는 방식이 구조적으로 다르거든요. 알파고도 다 헤아리지 못한 바둑 경우의 수를 인간의 머리로는 다 외울 수가 없죠. 그래서 단순한 암기로는 금방 한계와 맞닥뜨리는 겁니다.”
- 저도 바둑을 조금 둘 줄 알아서 그런지 재밌네요. 단순 암기로는 어렵다… 그럼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나에게 필요한 정보’만 축약시켜 암기해야 AI학습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뇌로 수용이 될 만큼 극도로 정밀하게 경우의 수를 줄여야 해요. 그렇게 좁혀지고 사전 학습된 자신만의 존(Zone)으로 유도할 수 있어야 전략전술이 가능하고 상대보다 유리한 포지션을 선점할 수 있습니다. 좁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AI학습을 하는 것은 홀로 망망대해를 걷는 것과 같죠.”
-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서 AI로 전술전략을 연구하면 효과가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되는데요. 그런데 ‘자신만의 존’을 만드는 게 쉬울 것 같진 않습니다.
“무척 어렵죠. 설계하는 데만 1년, 세부적인 항목을 만들고 테스트하는 데까지 2년이 소요됐으니까요. 그 ‘존’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학습자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데요. 연구소에서는 바둑AI와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을 활용해 세분화 한 9개 분야 24개의 항목 정밀분석표를 통해 학습자를 파악합니다. 이 분석정보로 학습자가 어떤 포지션이 승리에 유리한지 판단해서 영역을 만들어 나가는 거죠.”
- 흥미진진하네요. 학습 방법에 대해 질문하기 앞서 기존 바둑계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론인 듯한데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떠올리셨는지 궁금합니다.
“알파고가 바둑을 학습하는 과정에 대한 기사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충격을 받고 도대체 알파고가 어떤 알고리즘으로 인간을 이겼는지 찾아본 거죠. 딥러닝이란 기술도 신선했지만 저는 알파고의 ‘신경망(neural networks)’이 모래알처럼 많은 경우의 수를 비약적으로 압축시켜 준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그때 아, 이거다. 인간도 유사한 방식으로 학습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만큼은 아니더라도 엄청난 발전이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죠.”
- 바둑동네에서 ‘학습 연구소’는 처음 들어보는 듯합니다. 일종의 학원, 도장과 비슷한 개념인가요?
“학습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은 같지만 운영방식에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학원이나 도장은 학습자에게 공부하는 환경을 제공하고 선생이 교육도 직접 담당하고 있죠. 하지만 저희 연구소는 교육 환경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회원의 분석 결과와 자료제공, 커리큘럼 등 피드백은 드리지만 공부하는 건 회원님들의 몫인 거죠.”
- 그럼 학원이나 도장에 다니고 있는 원생들도 회원가입이 가능한가요?
“그럼요. 입단이나 성적에 목표가 있는 회원분께는 오히려 병행을 권장하는 바입니다. 반대로 학원이나 도장에서도 신경 써서 교육하고 싶은 학생에게 저희 연구소의 분석을 참고삼아 특별관리해보시는 것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 현재 얼마나 많은 회원이 가입돼 있나요?
“가입에 자격요건이 필요한 VIP회원은 마감됐고요. 일단 분석의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도록 30명 인원제한을 둔 상태입니다. 당분간은 이 인원들만으로 최선을 다해 서비스를 진행할 예정이고요. 여력이 생기면 조금씩 회원 수를 늘려나갈 생각입니다. 저희도 홍보하고 싶은 상위권 기사들이 많은데 보안을 위해 공개할 수 없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 회원 정보가 비공개인 건가요? 이유가 있나요.
“바둑도 AI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정보’에 대한 인식에 신경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연구소 회원임이 밝혀진다고 문제될 건 없으나 프로기사의 경우 ‘기보’가 다수 공개돼 있습니다. 저희도 회원들에게 상대의 분석서비스를 제공하니만큼 역으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거죠.”
- 다시 말해 ‘기보’가 유출돼 있으면 견제를 받을 수 있다는 거죠?
“그렇죠. 이미 해외기사를 포함해 핵심 기사들의 분석은 어느 정도 끝난 상황인데요. 기보가 공개돼 있으면 얼마든지 패턴이나 성향에 대한 공략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올초 농심신라면배 진행 당시 신진서 九단의 데이터가 굉장히 좋게 나왔고 커제 九단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 고스란히 분석표에 드러났습니다. 연구소에서는 가능한 회원들의 자료 보안에 신경을 쓰고 있는 입장입니다.”
- ‘AI학습’이 주류가 되면 지금과 달라지는 부분들이 있을까요?
“AI시대에는 장소, 나이, 실력 등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열정만 투자하면 모두 고수가 될 수 있는 세상이 AI시대의 특이점이죠. AI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바둑 약소국에서도 최고수가 탄생할 수 있고요. AI시대 이전엔 재능만으로 최고가 될 수 있었다면 지금은 AI에게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받느냐가 관건이죠. 앞으로는 AI학습 유무로 실력 격차가 더욱 심화될 거고요. 얼마나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성적의 잣대가 될 겁니다.”
- 마지막으로 한국바둑AI연구소의 비전과 목표가 궁금합니다
“AI시대가 시작된지 겨우 5년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시작이고 한국이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수 있도록 저희 연구소가 앞장서서 이바지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기사들이 중국 기사들을 상대로 AI학습을 통해 효과적으로 공략하여 좋은 성적을 내주면 좋겠고요. 유능한 영재들이 하루라도 빨리 AI학습을 시작해 한국바둑이 제2중흥기를 맞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인터뷰/김정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