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 챔피언에 도전하는 바투 챔피언 이재웅
2008년 출시된‘바투’를 기억하는가?
바둑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보드게임으로 2009년 e스포츠로 등록돼 리그까지 열릴 만큼 큰 화제를 낳았다. 당시 바투리그에는 조훈현ㆍ이창호ㆍ최철한 九단 등 쟁쟁한 프로기사들도 우승 도전에 나섰지만‘바투 최강’이라 불렸던 이재웅 八단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바투리그 초대 우승으로 입단 후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재웅(37)이지만 바투 이전의 성적도 나쁘진 않았다. 신예대회는 물론 종합기전 본선 단골멤버였고, 2006년에는 킥스(Kixx)팀 소속으로 바둑리그 우승을 맛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비씨카드배, 삼성화재배 등 세계대회 본선에도 이름을 올리며 랭킹도 20위권을 유지했다.
그랬던 이재웅이 바투 우승 이후 조금씩 조금씩 성적이 떨어지더니 급기야 랭킹 100위권 밖으로밀려났다. 2019년 제25기 GS칼텍스배 예선 이후에는 어떤 기전에서도 아예 이름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모 프로기사의 제보가 들어왔다.“이재웅 사범이 얼마 전 당구 프로에 데뷔했다는데 알고 계세요?” 잠시 잊고 있었다. 이재웅 八단이 오래 전부터 바둑계 알아주는 당구왕으로 유명했다는 사실을.
한 분야에서 프로가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재웅 八단은 하나도 아닌 두 분야에서 프로로 데뷔했다. 잘 나가던 프로기사 이재웅 八단이 당구 프로에 도전하게 된 배경과 과정이 궁금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단박에 OK한 이재웅 八단을 인천 미추홀구에 위치한 주안CC 당구클럽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바둑팬들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현재 프로당구협회(PBA) 3부 리그에서 당구선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곳으로 나와 당구 연습을 해요. 오후가 되면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당구장에 가서 또 연습을 하고요. 하루 종일 당구장에서 살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하.
- 부모님께서도 당구장을 운영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곳에서 연습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바둑의 경우는 기력에 따라 바둑판 사이즈가 달라지진 않잖아요. 하지만 당구는 초보자들이 즐기는 중대가 있고 선수용 큰 테이블인 대대가 있어요. 부모님은 제가 5살 때부터 당구장을 운영하고 계시지만 선수용 대대가 없어요. 그래서 큰 테이블이 있고 많은 선수들이 훈련하는 이곳을 연습장으로 삼았죠.
- 예전에 뵀던 모습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신 것같아요.
당구하기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서서 허리를 숙이고 하다 보니 허리를 받쳐주는 힘도, 지탱하고 서 있을 다리의 힘도 아주 중요해요. 20대 중반에 허리 통증으로 크게 고생한 이후 술을 끊었더니 살이 많이 빠지고 허리도 좋아졌어요.
바둑과 당구는 쓰는 근육이 달라요. 바둑은 팔을 앞으로만 뻗는 반면 당구는 뒤로 뻗어야 하니하루 이틀 바둑을 두고 당구를 치면 확실히 몸이 알아차리더라고요. 당분간은 당구선수의 몸으로 살아야 하니 꾸준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체력 보강을 위해 비가 심하게 오는 날만 빼고는 꾸준히 걷기 운동도 하고 있어요.
- 바둑팬들은 생소할텐데 PBA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시죠.
당구 단체는 예전부터 있었고 플레이어는 모두 선수라고 칭했죠.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모든 스포츠가 프로라는 호칭을 쓰고 있는데 당구도 그렇게 하면 어떨까 해서 탄생한 게 PBA예요. 여러기업에서 후원을 하면서 규모도 커졌죠.
PBA가 생기기 전에는 국내에서 우승하면 상금이 100만원에서 1000만 원 사이였고 1000만 원이면 엄청나게 큰 상금이었어요. 이제는 남자부 우승 상금이 최대 1억 원인데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꿈의 금액이죠. 프로리그는 1부부터 3부까지 있고 3부에 들어가려면 ‘트라이아웃’이라고 바둑으로 치면 입단대회 같은 걸 통과해야 해요.
저는 올해 7월부터 2022-2023년 3부 선수로 뛰게 됐고 1년 동안 12번의 대회를 통해 잔류 여부가 결정돼요. 성적에 따라 바로 1·2부로 올라갈 수도있고, 그렇지 못하면 강등되는 시스템으로 연구생리그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 입단 후 꾸준히 본선에 오르는 등 바둑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통 바둑은 아니지만 2009년에는 월드바투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고요. 입단하고 성적이 나쁘진 않았어요. 랭킹도 20위권이었고요. 바투는 출시되고 바로 시작하지 않았어요. 1년 정도 지켜만 보다가 해보면 재밌겠다는생각이 들어 시작했는데 완전히 빠져버렸죠. 하루에 15시간씩 바투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우승까지 하게 됐습니다.
- 그렇게 바둑에서 잘 나갔는데 갑자기 당구에 도전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바투라는 게임이 사라지고 다시 정통의 바둑으로 돌아왔을 때 혼란스러웠어요. 바투는 3·三에 착수하면 벌점 5점을 받아요. 2년 정도 바투 수천 판을 하다 보니 3·三 벌점에 대한 압박이 너무 심했어요. 바둑을 두다 보면 분명히 좋은 자리라는 걸 알면서도 3·三에 돌을 놓지 못 하겠더라고요.
그러다 알파고가 등장했고 마스터에 제로에…, 50선 대국을 보여주는데 모든 기보가 시작하자마자 3·三에 두는 걸 보니까 어지럽더라고요. 남들이 볼 땐 ‘그냥 두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어요.
- 당구 프로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은 어땠나요?
처음 당구를 제대로 해보려고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나 주위 분들이 엄청 반대를 했죠. 바투 전까지는 성적이 나쁘진 않았으니까요. 당구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30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였는데 지금이라도 바둑을 다시 공부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는데 이미 그때는 인공지능으로 공부하기 시작할 때라 거부감이 너무 심했죠. 제가 앞으로 더 잘해야겠죠.
- 부모님이 당구장을 운영하셔서 어릴 때부터 당구에도 소질이 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당구 프로가 아닌 바둑 프로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둘 다 다섯 살 무렵 접하게 됐어요. 당구는 아버지 손을 잡고 당구장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빠지게 됐고, 바둑은 TV에서 우연히 MBC제왕전을 보다 푹 빠지게 됐죠. 바둑학원을 보내달라고 졸랐는데 아쉽게도 너무 어린 저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어요.
아홉 살까지 혼자 공부하다 열 살이 돼서야 받아주는 곳이 있었고 그때부터 꾸준히 어린이 대회에 나갔어요. 나가는 어린이 대회마다 입상하고 5학년에 전국대회 우승을 하면서 프로기사의 길을 걷기로 마음 먹게 됐어요. 그 당시 당구는 어린이 대회가 없었기 때문에 취미로 하게 됐어요.
- 아무리 당구에 빠져 사는 요즘이라지만 바둑에 대한 애정도 여전하실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지금은 당구에 매진하고 있지만 바둑은 제가 잊을 수 없는 애정하는 것 중 하나죠. 요즘은 하루에 한 번 바둑 사이트에 들어가서 최신 기보들을 챙겨보고 있어요. 물론 기사도 보면서 바둑계 소식도 접하면서 지냅니다.
- 바둑계 친구들과 종종 당구도 치시나요?
얼마 전에도 (조)한승이 형이 왔다가 갔고요. 그전부터는 (이)세돌이 형, 최철한, 송태곤 등등 바둑계에 당구 친구들이 엄청 많아요. 이용찬 사범님, 김승준 사범님이 굉장히 잘 치시는 편이지만 숨은 고수는 한승이 형이죠. 한승이 형이 본인한테 짠 편이라 점수를 낮게 놓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고수의 실력을 가지고 있어요.
- 사범님이 생각하시는 바둑과 당구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단 두 명만 있어도 할 수 있는 게임이고, 때로는 혼자서도 가능하다는 점이 비슷한 것같아요. 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실내 스포츠이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게임이죠. 제가 생각하는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바둑, 당구 모두 변화가 많아서 실력이 늘고 올라갈수록 어려워지지만 그만큼더 재밌다는 거예요.
- 이제 막 당구 프로선수로 첫발을 내딛었습니다.앞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신가요?
표면적으로 봤을 땐 2부 리그, 1부 리그 승격이겠지만 저는 바둑도 당구도 돈을 벌기 위해 직업으로 선택하진 않았어요. ‘이게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재밌게 해주는구나’라는 생각에 하는 것 같아요. 앞서 말했듯이 바둑에 비해 당구가 더 많은 체력이 필요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건강하게 오래오래 즐기면서 하고 싶습니다.
- 그렇다면 바둑기사로서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지금은 잠시 외도 중이라…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하하). 예전엔 바둑만 잘 둬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프로기사도 톱클래스가 아니면 힘든 경우도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다른 일을 하는 분도 굉장히 많다고 알고 있어요. 후배들 중에서도 분명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친구들이 있을 거예요. 그 친구들한테 힘이 될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
‘이재웅 사범님도 하셨는데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그리고 바둑과 당구를 함께 하는 유일한 선수로서 양쪽에서 홍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싶습니다. 당구 치는 프로기사, 바둑 두는 당구선수. 재밌지 않아요?
- 끝으로 바둑팬들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거의 10년 가까이 대회나 뉴스에서 이름이 보이지 않아 궁금하셨을 텐데요. 지금은 바둑을 잠시 멀리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갈 거예요. 한번 시작한 거 어설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당구에서 실패하니 고향 같은 바둑으로 돌아왔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게 당구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당구에서도 성공한 이재웅으로건강하게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