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의 현장 | 2023 크라운해태배 결승3번기
박건호(26)가 입단 후 첫 우승을 거머쥐며 2024년을 누구보다 기분 좋게 출발했다.
금년 국내기전 첫 결승무대였던 크라운해태배는 박건호에게 여러모로 상성이 잘 맞는 대회였다.
2017년 출범한 크라운해태배에 한 해도 빠짐없이 출전한 박건호는 이번 대회가 나이 제한에 걸려 마지막으로 출사표를 올린 무대였는데, 최종장원급제하며 최우수 졸업을 알렸다.
2월 7일 한국기원 바둑TV스튜디오에서 막을내린 2023 크라운해태배 결승3번기 3국에서 박건호 八단이 설현준(25) 八단에게 250수 만에 백불계승하며 종합전적 2승 1패로 우승했다(관련상보 48쪽).
박건호는 5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결승1국에서 169수 만에 흑 불계승(관련총보 130쪽)하며 앞서갔지만 6일 속개된 결승2국에서 251수 만에 백 불계패하며 1-1 동률을 허용했다.
상성 잘 맞았던 크라운해태배, 정상 찍고 졸업
국후 박건호는 결승3국을 앞두고“취침 전 2시간 정도를 포석 연구에 할애했다”고 밝혔다.
천운이었는지 그동안 궁합이 잘 맞았던 크라운해태배 결승 최종국에서 전날 연구한 포석이 등장했다. 흑을 잡고 두텁게 반면을 운영한 박건호는 엷은 돌 추궁에 일가견을 가진 설현준의 주특기를 제대로 봉쇄했다. 후반 곤마 타개에서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박건호는 입단 후 첫우승과 함께 입신(入神) 등극에 성공하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마당 쓸고 엽전 줍게 한 크라운해태배였다.
설현준에게 승리하며 상대 전적도 조금 더 격차를 벌이게 됐다.
(※결승3국 다음날 이어진 쏘팔코사놀 최고기사결정전 최종예선에서 패했지만 상대전적은 10승 8패로 박건호가 앞서 있다.)
2015년 입단한 박건호 九단은 크라운해태배 우승 전까지 2018년 미래의 별 신예최강전(vs 안정기 0-1), 2023년 크라운해태배(vs 신민준 0-2)와 용성전(vs 신진서 0-2)에서 준우승만 세 차례 기록했지만, 이번 우승으로 입단 9년 만에 타이틀 보유자 클럽에 가입했다.
반면 설현준 八단은 크라운해태배 결승 진출에 이어 2기 5육七관절타이밍 한국기원 선수권전 결승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본인 랭킹 최고인 6위까지 기록하는 상승세를 탔지만, 최종 우승 결정국에서 패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설현준 八단은 2020 크라운해태배 결승에서 이창석 六단(당시)에게 패해 준우승 한 데 이어 2023 크라운해태배에서도 준우승하며 이 대회에서 유일하게 준우승만 2회 차지하는 불운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다음은 우승 직후 박건호 九단과의 일문일답.
- 크라운해태배에서 첫 우승을 일궜다, 소감은?
크라운해태배는 저에게 정말 고마운 기전이다. 대회 초창기 제가 대국 수가 부족했을 때는 스위스리그로 많은 실전을 가능케 했고, 지난해 준우승에 이어 올해 우승컵까지 안게 됐다. 이번 대회를 끝으로 참가하지 못하지만 평생 잊지 못할 기전으로 남을 것 같다.
- 설현준 八단과 결승에서 만나게 됐을 때 자신감은 있었는지?
워낙 어렸을 때부터 많이 둬와서 서로 자신감이 있었을 걸로 생각된다. 저는 상대전적이 비슷하다고 봤는데 생각보다 많이 이긴 것 같다.
- 결승을 앞두고 어떤 준비를 했는지?
결승에 오르고 나서 설현준 八단에 대한 준비를 조금 하긴 했다. 둘이 둘 때는 항상 패턴이 좀 더 두터움을 가진 사람이 승리할 때가 많았던 것 같아 그 부분에 주안점을 두었다. 결승 1, 2국에서 보셨다시피 1국에서는 제가 두터워지니까 그냥 쉽게 승리했고, 2국에서는 제가 엷어지니까 무기력하게 졌다. 그래서 3국에서도 좀 두텁게 둬야겠다는 전략을 짜며 임했다.
- 고향이 경남 양산이던데, 사투리가 거의 없는 것같다.
중학생 때 서울 올라오면서 친구들이 놀릴까봐 말하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양산 출신이라 동료 기사들이‘양산박’이라고 부르곤 한다.
- 박건호 九단 하면 지난해 5월 구쯔하오 九단과벌인 란커배 4강 대국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당시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본선에서 셰얼하오·왕싱하오 등 중국 선수들에게 파죽의 3연승을 거두면서 4강에 올랐고, 구쯔하오에게도 중반까지 필승 국면을 연출하다 막판 낙마했다. 만일 그때 이겼다면 신진서 九단과 세계대회 우승컵을 놓고 대결했을 텐데, 워낙 아쉬운 패배였을 것 같다.
주변에서 진서가 우승 못한 건 너 때문이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제 기억으로는 팻감도 제가 많아서 패싸움을 계속했으면 됐는데, 형세판단에 오판이 있었다. 당시 집으로 가도 이긴 것 같아 타협을 했는데 결국 역전패로 이어졌고, 진서도 우승컵을 놓치는 바람에 두고 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 입단하고 첫 타이틀 획득인데 동료들에게도 크게 한턱 낼 예정인지?
지난해 란커배 4강 진출 때도 한국에 돌아와 밥을 많이 샀는데 이번에는 우승이니 당연히 한턱 낼 생각이다^^.
- 본인 바둑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제가 볼 때 균형 감각이 괜찮은 것이 장점인 것같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 전체적으로 고른 바둑이라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이게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수읽기와 끝내기는 초일류기사들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한 편이다.
-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제가 원래 포석에 강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중국 갑조리그에서 초반이 좋은데도 역전을 많이 당하곤 했다. 그래서 포석 공부보다는 중후반 공부를 위주로 했는데, 그러다보니 갑조리그를 두면서 포석이 너무 이상해지고 말았다. 이후 얻은 결론은 어느 하나 놓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포석, 끝내기, 사활 등을 두루두루 공부하고 있다.
- 바둑 공부는 주로 어떻게 하는지.
대국이 없을 때는 국가대표 훈련실에서 하루 7∼8시간 정도 공부하고, 집에 와서 AI로 2시간정도 더 하는 것 같다.
- 현재 랭킹이 17위인데, 가장 좋았을 때는 7위(2023년 1월)까지 올라갔다. 중국리그에서의 좋지 않은 성적이 랭킹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은데.
맞는 말이다. 대국 수가 너무 과해 체력적인 부담이 있다고 걱정해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결국은 제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중국리그는 내년에도 뛸 생각인지?
웬만하면 올해 군대를 갈 예정이다. 느낌상으로는 올 가을쯤 영장이 나올 것 같은데, 현재 뛰고 있는 바둑리그와 중국리그를 잘 마무리하고, 입대 전 가능한 세계대회도 출전한 후 육군에 입대할 생각이다.
올해 군입대를 앞두고 있지만 씩씩하게 병역의무를 다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밝힌 박건호 九단.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성적이나 결과는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라고 설파했다.
꾸준한 노력파의 대명사 박건호는 이번 우승을 발판 삼아 올 한해를 자신의 해로 만들 것을 다짐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그의 늠름한 모습에서 한국 바둑의 미래를 보았다고 하면 과찬일까?
<글/차영구 편집장·사진/이주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