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신화 이창호
특별기획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 - 제6편 이창호(下)
‘바둑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2018년 11월 5일, 한국기원은 한국바둑을 빛낸 국수 7인을 선정 발표했다. 본 특별기획에서는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고(故) 조남철 선생을 비롯해 바닥이던 한국바둑을 세계최강으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김인 조훈현 조치훈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등 한국바둑의 거장 7인의 삶과 업적을 총 14회(국수 1인당 2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살아있는 신화 이창호
-한 사내가 관문을 지키고 있으니
■글 _ 안성문(바둑리그 전문기자)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있다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 중국 창하오 九단
90년대 초반 메이저 국제대회는 대만의 응창기 재단이 개최하는 응씨배와 일본의 후지쓰배, 한국의 동양증권배 이 세 개였다(국제기전이 우후죽순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96년 삼성화재배와 LG배가 생기면서부터다). 뭇 고수들이 이들 무대로 종횡으로 얽혀들었다. 일본은 기존 강자들이었던 조치훈, 고바야시, 다케미야, 린하이펑에 사무라이의 모습을 한 요다 노리모토가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했다. 중국은 녜웨이핑이 명성보다는 부진했으나 그의 제자 마샤오춘이 일약 유망주로 떠올랐고 다른 유망주 위빈, 창하오 등도 열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중일이 접전 양상을 보이던 이 시기, 이창호는 국내무대에서는 스승을 넘어 일인자의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지만 해외대국에는 유독 약했다. 1992년과 93년 10대의 나이로 동양증권배를 2연패하며 일류 클럽에 이름을 올렸지만 과연 용으로 승천할 지는 미지수였다. 대신 이창호에게 국내기전을 다 빼앗긴 3인방(조훈현, 서봉수, 유창혁)이 밖에서 힘을 냈다. 1993년과 94년 한국은 세 개의 메이저 대회에 단체전까지 모든 세계대회를 휩쓸며 머나먼 변방국에서 맹주로 도약한다. 꿈에서조차 상상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국내는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모든 매스컴이 잇단 낭보를 전하느라 바빴다. 한국기원이 발행하는 월간『바둑』은 3만부를 찍었는데도 며칠 만에 다 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한국바둑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잠잠해진다. 괴이한 인물 하나가 혜성처럼 등장한 때문이었다.
#마샤오춘을 넘어 세계 일인자로
마샤오춘 九단. 1995년은 그의 해였다. 정초에 스승 녜웨이핑을 꺾고 동양증권배를 우승한 그는 여름에는 일본의 일인자 고바야시 고이치를 꺾고 후지쓰배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 해는 응씨배가 안 열려서 국제기전은 2개. 그 둘을 단숨에 석권한 마샤오춘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세계랭킹 1위였다.
고개를 삐딱하게 외로 꼬고 자세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수읽기 하는 모습. 앞 버드렁니를 굳이 감추지 않은 채 약간은 냉소적인 웃음기와 시니컬한 시선이 섞인 표정. 1964년생으로 이창호보다 11살 위인 그는 외모에서부터 독특한 기운을 풍겼다. 기풍은 굉장히 감각이 좋은 실리파면서 타개에 능한 형. 특히 전성기 시절 ‘마요도(馬妖刀)’라 불렸을 정도로 요사스러운 행마는 감히 따라올 자가 없었다. 마샤오춘을 두고 일본의 괴걸 후지사와 슈코는 “천부의 재능이라면 첫 번째가 조훈현, 두 번째가 마-이다”라고 말했다.
피아노를 프로급으로 연주하고 비상한 기억력을 지닌 그는 말 그대로 천재였다. 그러나 이창호라는 불세출의 천재와 같은 시대, 같은 하늘을 이고 산 업보 때문에 비운의 천재, 비운의 승부사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스승 녜웨이핑이 조훈현과의 숙명의 승부에서 패한 뒤 사라진 것처럼.
96년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이창호에게 필승의 바둑을 반집 차로 역전당한 것이 상처가 됐다. 이후 후지쓰배 결승에서 다시 패했고, 3년 후인 1999년에는 삼성화재배와 LG배 두 번의 결승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맞섰지만 모두 패했다. 상대전적 6승25패. 한동안 내리 10연패를 당한 적도 있으니 그가 느낀 수모와 절망감이 오죽했으랴. 하물며 중국 팬들이 느끼는 굴욕은 녜웨이핑-마샤오춘 2대에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샤오춘의 자리를 대신하고 나선 창하오도 ‘이창호 콤플렉스’에 10년 이상 시달려야 했다.
#찬란하구나, 일인 천하의 기록
마샤오춘과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승리한 이창호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후 2003년까지 이창호는 거의 학살 수준으로 세계 강호들의 무릎을 꿇리며 그만의 시대를 열어 간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나왔던 그 시절. 먼저 개인의 명예와 국가의 명예, 커다란 상금이 걸려 있는 메이저 국제기전에서의 그의 성적을 들여다보자. 1992~2003년 12년간 이창호의 메이저 대회 결승 진출 횟수는 18회이며 그중 16회 우승하고 있다. 결승전에서 우승 확률이 거의 90%에 육박하는 88.9%. 열 번 결승에 오르면 아홉 번을 이겼다는 사실이 다시 봐도 새삼 놀랍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내용이다. 결승전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국기사끼리 겨루는 경우와 외국기사와 겨루는 경우로 나눌 수 있는데 18회 중 6회는 한국기사와, 12회는 외국기사와 겨루고 있다. 한국기사끼리 겨뤄서 바둑팬 입장에서 보자면 누가 이기더라도 큰 상관이 없는 경우를 뺀 나머지 12회에 걸친 진검승부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1992년 3회 동양증권배 - 이창호 vs 링하이펑(일본) ☞ 이창호 3:2 우승
1993년 4회 동양증권배 - 이창호 vs 조치훈(일본) ☞ 이창호 3:0 우승
1996년 7회 동양증권배 - 이창호 vs 마샤오춘(중국) ☞ 이창호 3:1 우승
1996년 9회 후지쯔배 - 이창호 vs 마샤오춘(중국) ☞ 이창호 1:0 우승
1997년 2회 삼성화재배 - 이창호 vs 고바야시 사토루(일본) ☞ 이창호 3:0 우승
1998년 11회 후지쯔배 - 이창호 vs 창하오(중국) ☞ 이창호 1:0 우승
1998년 3회 삼성화재배 - 이창호 vs 마샤오춘(중국) ☞ 이창호 3:2 우승
1999년 3회 LG배 - 이창호 vs 마샤오춘(중국) ☞ 이창호 3:0 우승
1999년 4회 삼성화재배 - 이창호 vs 조선진(일본) ☞ 이창호 3:0 우승
2001년 4회 응씨배 - 이창호 vs 창하오(중국) ☞ 이창호 3:1 우승
2003년 1회 도요타덴소배 - 이창호 vs 창하오(중국) ☞ 이창호 1:0 우승
2003년 3회 춘란배 - 이창호 vs 하네 나오키(일본) ☞ 이창호 2:0 우승(세계대회 그랜드슬램)
12전 전승!
이 뿐인가, 국가대항전이라 할 수 있는 단체전 국제대회 최종국의 결과도 의미심장하다. 바둑에서 메이저급 국가대항전은 보통 승발전 방식으로 치러지는데, 쉽게 말하자면 이긴 사람이 다음 기사를 맞아 계속 대결하는 방식이다. 그런 식으로 차례차례 떨어져나가고 마지막 남은 두 기사의 대국이 최종국 겸 결승전이 된다. 이 시기 한국팀의 단체전 최종주자는 조훈현이나 이창호가 맡는데, 그중 이창호가 최종주자로서 대국한 경우를 보자. 일단 2004년까지 그런 경우는 모두 여섯 번.
1993년 2회 진로배 최종국 - 이창호 vs 다케미야 마사키(일본) ☞ 이창호 승리 / 한국우승
2000년 1회 농심배 최종국 - 이창호 vs 마샤오춘(중국) ☞ 이창호 승리 / 한국우승
2001년 2회 농심배 최종국 - 이창호 vs 가토 마사오(일본) ☞ 이창호 승리 / 한국우승
2002년 3회 농심배 최종국 - 이창호 vs 저우허양(중국) ☞ 이창호 승리 / 한국우승
2003년 4회 농심배 최종국 - 이창호 vs 뤄시허(중국) ☞ 이창호 승리 / 한국우승
2004년 5회 농심배 최종국 - 이창호 vs 린하이펑(일본) ☞ 이창호 승리 / 한국우승
6회 모두 우승!
이창호는 반드시 이겨야 할 최종전에서 모두 이겼으며 자신이 지면 우승컵을 넘겨주게 되는 대국에 임해 10연승을 거뒀다. 이 시기의 이창호는 그야말로 무적이었으며 누구도 넘을 수 없는 ‘불패의 수문장’이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지나고 보면 이런 빛나는 궤적조차 다음해인 2005년의 대사건을 예고하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창호는 이 해에 농심배에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는다.
# “사진처럼 찍혀요”
프로기사든 운동선수든 최정상에 오르는 건 참으로 어렵다. 일인자가 된 후 그 자리를 지키는 건 더 어렵다. 승부로 날이 새고 승부로 날이 지는 인생도 반복되면 단조로운 것이다. 매번 1등을 하면 2등이나 3등, 꼴찌를 하는 사람에 비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거듭되다 보면 팍팍해진다.
이창호도 사람인 이상 그런 권태로움 앞에서 예외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현실적으로는 계산력의 퇴조가 문제가 됐다. 2004년, 만 서른을 앞두고 최대의 주무기 하나가 말썽을 피우기 시작했다. 신산(神算)이란 별명의 계산의 천재에게서 오류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0대 시절, 이창호는 크루즈 미사일과 같았다. 천리 밖을 저공비행으로 날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중시키는 공포의 병기. 그것이 있었기에 아무리 불리해도 끝에 가서 뒤집을 수 있었고, 반집만 유리하면 잡을 대마도 안 잡고 끝낼 수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 능력이 하도 불가사의해서 나는 언젠가 월간『바둑』 해설을 받을 때 대뜸 물어 본 적이 있다. “어떻게 수를 읽는 겁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우문이었다.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잠시 머뭇거리던 이창호 九단의 입에서 뜻밖의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사진처럼 찍혀요”
그때의 충격, 그때의 한마디를 나는 30년이 다 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창호는 수를 차근차근 읽은 게 아니라 뭉텅이로 ‘찍듯이’ 본 것이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기억력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이 의미를 명확히 전달할 길이 없어 그저 ‘전광석화’라는 표현을 썼던 것 같다. 번개처럼 수를 찍어보고 지는 길이 나오면 재빨리 궤도를 수정하는. 그러니 늘 반집을 이기는 것이었고, 그러니 무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알파고처럼 적확하고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사진을 찍어놓으면 다시 계가를 할 필요가 없다. 간단하게 +, -만 계산하면 된다. 당대 그 누구보다도, 아니 5000년 바둑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방식의 계가법을 스스로 터득한 이창호는 다름 아닌 ‘원조’ 알파고였던 것이다.
# 한 사내가 관문을 지키고 있으니(一夫當關) 만 사내도 관문을 열지 못하는구나(萬夫莫開)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며 인간의 힘과 능력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순환한다. 차고 또 기운다. 그 법칙이 이창호 九단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이세돌을 필두로 최철한, 목진석 같은 신예 강자들이 벌떼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계산력의 퇴조가 겹치면서 중천의 태양 같았던 이창호에게도 석양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목진석이 KBS바둑왕전에서 이창호를 밀어내더니 이세돌이 LG배에서 이창호를 넘어섰고 최철한도 이창호로부터 국수를 빼앗는 믿기 힘든 일들이 속속 펼쳐졌다. 더구나 국수전은 0:3이라는 충격적인 스코어였다. ‘번기의 제왕’ 이창호에게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다. 최철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6개월 후 기성전에서도 다시 이창호를 상대로 타이틀을 쟁취함으로써 국수 쟁취가 일회성이나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인터넷에선 “이창호도 처량하게 됐다”는 식의 글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된 것이 2004년 말에 막을 올린 제6회 농심배였다. 이 대회에서 5년 연속 이창호 九단에게 막혀 좌절한 중국은 절치부심 이때에 최정예를 출전시킨다. 반면 안달훈 六단, 한종진 五단, 유창혁 九단, 최철한 九단, 이창호 九단으로 구성된 한국은 객관적인 전력에서 중국에 뒤처진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이창호 九단이 뒤를 맡아 주겠지”라는 기대감에 막연한 낙관론이 넘치는 상태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기대 이하다 못해 참담하게 흘러갔다. 안달훈과 한종진, 유창혁은 1승도 거두지 못하고 탈락했고 최철한 九단마저 1승에 그치고 퇴장하면서 한국은 일찌감치 이창호 九단만이 남게 됐다. 반면 중국은 3명이 남았고 일본도 2명. 한 수 아래로 간주하던 일본조차 2명이 남아 있는 상황을 보며 국내 팬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중국은 자신들의 우승을 기정사실화 해놓고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이후의 스토리를 우리는 잘 안다. 15년이 지났음에도 생생히 기억한다. 몇 년 전 드라마(응답하라 1988)로도 재현돼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전설이 된 그 장면. 최악의 압박감과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묵묵히 바닥을 보며 대국장을 향하던 택이, 아니 이창호의 그 모습과 함께.
결전의 장 상하이. 그 곳에서 이창호 九단은 2005년 2월 23일부터 26일까지 열린 3차전 대국을 내리 이기며 기적처럼 한국의 우승을 이뤄냈다. 일본의 왕밍완과 장쉬, 중국의 뤄시허와 왕레이, 그리고 최종국에서 마주한 왕시. 이 5명이 차례로 이 九단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때에 중국 사람들이 받은 충격과 절망감, 나아가 이창호에 대한 경외감이 어떠했는가는 다음날 중국 각지에서 발행된 신문의 제목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석불(石佛)은 거대한 산처럼 움직이지 않았다”(베이징 체단주보)
“한 사내가 관문을 지키고 있으니(一夫當關)
만 사내도 관문을 열지 못하는구나(萬夫莫開)”(상하이 현대쾌보)
“그대는 어찌하여 중국 사람들에게 이토록 깊은 상처를 주는가”(사천성 성도상보)
“바둑기사로서 이창호와 동시대에 산다는 것은 잔혹한 일”(난징 양자만보)
#생애 최고의 순간...농심배 30연승 신화
국내에는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인터넷엔 “월드컵 4강보다 더 국가 명예를 드높인 쾌거”란 댓글이 줄을 이었다. 최종국이 벌어지던 날 개국 이래 최고 시청률을 올렸다는 바둑TV의 한 PD는 “흑산도에서 조업 중이던 선원, 결혼식을 마친 신랑 등으로부터 승패를 묻는 전화가 빗발쳤다”며 즐거워했다. 이창호가 개선한 27일 인천공항엔 30여 명의 팬클럽 멤버들이 갖가지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환호했고, 공항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도 박수로 ‘국민 영웅’을 맞이했다.
이 대회의 5연승을 포함해 6회까지 본선에서만 14전 전승. 국내 예선까지 포함하면 농심배 30연승의 신화가 씌어졌다. 1997년 제5회 진로배 때 서봉수가 세운 9연승, 80년대 벌어진 중·일 슈퍼대항전서 중국 녜웨이핑이 4년간 거둔 11연승 등도 이 앞에서 묵은 기록이 됐다(이창호 九단은 2010년 농심배에서 다시 혼자만 남은 상황에서 중국의 류싱, 구리, 창하오를 꺾으며 3연승, 한국의 8번째 우승을 이끈다).
“기쁨보다는 무거운 부담감을 벗었다는 사실에 홀가분했다”
이창호 九단은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서전 [부득탐승]에는 단체전에 임하는 그의 심정, 이때 느꼈던 기쁨이 보다 자세히 서술돼 있다.
“내가 생각하는 ‘생애 최고의 순간’은 거액의 상금이 걸린 세계타이틀전 우승이 아니다. 그 가슴 벅찬 순간은 내가 국내외 타이틀전에서 기록한 140회의 우승, 그 안에 없다. 그것은 바로 몇 번의 우승을 차지해도 개인의 기록으로 남겨질 수 없는 단체 국가대항전의 우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준 것이 바로 농심신라면배였다. 12회의 국가대항전을 치르는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출전한 유일무이한 기사라는 영광은 내 기사생애의 소중한 기록이다.”
#선계(仙界)에서 인간계(人間界)로...아날로그 시대의 종언
세 글자 ‘이창호’는 바둑팬들에게 이름 이상의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역사이자 전설이며 다시없을 세계바둑계의 패왕으로.
11세, 운동화 끈을 풀어 젖히고 얼음과자를 우물거리는 모습으로 관철동에 나타난 퉁퉁한 체구의 소년은 얼마 안 가 “꼬마 강태공”이란 칭호를 얻는다. 그 표정 없는 얼굴로 갓 고등학생이 된 16세에는 첫 세계타이틀을 획득하며 만천하에 이름을 알렸다. 그 후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세계바둑의 역사는 이창호의 시대 14년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무정한 세월은 한편으로 흐르는 시간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화는 점점 퇴색되었다. 이창호는 2006년 이후 7년이라는 기간에 연속 10회나 세계대회 준우승에 그친다. 국내 무대에선 2010년 국수전 우승이 마지막 타이틀이 됐다.
한때 세상 모든 기사가 나이 앞에 굴복해도 이창호만은 60을 넘어서까지 정상을 지킬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확신했었다. 하지만 설마 했던 많은 사람들도 이제 와선 ‘석불’ 이창호는 쇠퇴하고, 찬란했던 시절은 지나간 일이 되었음을 아쉽지만 인정하고 있다. 2010년 결혼해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이창호는 올해로 45세다. 주위에선 ‘딸 바보’로 통한다.
이세돌이 인간계에서 인공지능과 대결해 승리한 유일한 사람이라면 이창호는 사람 냄새 물씬 났던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제왕이다. 그는 여전히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른다. 휴대전화는 스마트폰을 갖고 다니지만, 통화와 문자 등 기본적인 기능 외에는 사용할 줄 모른다. 심지어 카카오톡도 사용해본 일이 없다. 대세가 된 인공지능 프로그램 사용에 대해서도 그는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젓는다. 이 九단은 “이제 와서 나를 바꾸기에는 나와 세상의 격차가 너무 크게 벌어진 것 같다. 더구나 세상의 변화 속도도 너무 빨라서 따라잡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상태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고 말한다.
한가한 시간엔 주로 책을 읽는다. 매년 100권 읽기를 목표로 삼을 만큼, 책 욕심이 많다. 책을 고를 때는 세상의 평판에 특별히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더러는 가까운 사람의 권유도 있지만 대부분 그때그때 관심 끌리는 대로 필요한 것을 찾아 한 권, 한 권 씹어 삼키듯 꼼꼼하게 읽는다. ‘읽는다’는 표현보다는 초식동물의 그것처럼 ‘소화시킨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일주일에 한번 바둑리그에 출전해 팀원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전신인 2003년의 드림리그부터 따지면 올해로 17년째다. 여전히 진땀을 흘리고 여전히 세수를 거듭하며 승부하지만 성적은 갈수록 하강세다. 이번 시즌엔 3지명으로 30% 정도의 승률밖에 거두지 못했다. 대신 2부 리그의 후배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려고 노력한다.
돌부처 스타일 바둑으로 세계를 평정했지만, 이창호는 요즘 돌부처의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나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2016년 11월부터 한국기원 이사로서 활동의 폭을 넓히게 된 것도 계기다. 이창호는 “한국기원에 행사가 있을 때 이사로서 가끔 참석하는 정도”라면서도 “개인적인 문제인데, 붙임성이랄까 사회성이 많이 부족하다. 노력을 해보려고 생각하는데 쉽지 않다. 노력해야 할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이세돌의 은퇴 또한 그에게는 편한 일이 되었을 것 같진 않다. ‘의문의 1패’를 당했다고나 해야 할까. 가만 앉아 있는 그에게 불똥이 튄 것이다. 얼마 전 바둑리그 현장을 찾은 한 기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창호 九단도 벌 만큼 벌었잖아요.”
나는 그 말이 잘못 됐다고 생각한다. 이세돌은 이세돌이고 이창호는 이창호이기 때문이다. 한발 양보해 그 기자의 말대로 이창호는 처량한가. 아니다. 나는 지금의 이창호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30년을 짓누르던 승부의 부담에서 벗어나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수들을 산책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바둑의 즐거움에 빠져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이래라 마라 할 자격은 없다. 나는 그저 편안히 그를 지켜보자고 말하고 싶다.
돌이켜 보면 이창호와 함께 한 30년이었다. 그 세월을, 그 숱한 세계바둑의 전장을, 우리는 그와 한 몸이 되어 누볐다. 대부분 환호했으며 가끔은 울었다. 그만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해준 사람은 드물었다. 이 위대한 인물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 그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는가. 더구나 그는 아직 보여줄 것이 많은 사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