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으로 출발한 한국 바둑, 현재는 쾌청
▲ 7월 1일 한국기원에서는 '박정환,신진서 9단 연속 세계 제패' 환영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신진서 9단, 임채정 한국기원 총재, 박정환 9단.
2019년 세계바둑대회에서 한국 바둑은 암울하게 시작했다. 2018년 12월 삼성화재배와 천부배 결승전에서 중국 선수에게 우승컵을 넘겨준데 이어, 1월의 바이링배에서도 신진서 9단이 중국의 커제 9단에게 0:2로 완패를 당하며 또 다시 준우승에 그쳤기 때문이다. 세계대회만 열렸다 하면 우승은 당연히 우리나라 선수인데, 누구냐가 관건이었던 시절을 추억하며 ‘아, 옛날이여!’를 불러야 했다.
이창호, 이세돌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1인자들이 세계바둑계를 호령하며, 다른 정상권 선수들이 뒷받침해주던 시절 일본과 중국은 어쩌다 한번 우승의 맛을 봤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중국의 파상 공세에 어느덧 우리나라는 중국과 입장이 바뀌고 만 것이다. 그 중국의 선봉장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커제 9단이다. 1997년생인 커제 9단은 2015년부터 세계대회 우승컵을 모으기 시작하더니, 지금까지 메이저 세계대회에서만 일곱 번 우승했다. 이창호, 이세돌 9단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기록이다.
세계바둑대회에서 계속 중국에 밀릴 것만 같던 우리나라는 묘한 곳에서 행운이 찾아오며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중국은 매년 설 특집으로 한중일 정상급 기사3명을 초청해서 하세배라는 이벤트 대회를 개최한다. 이벤트 대회라고는 하지만 우승 상금이 80만 위안(약 1억 3천6백만원)이나 된다. 2년 동안 치르는 메이저 대회인 춘란배 우승 상금 15만 달러(약 1억 7천 5백만원)와 비교해 보면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올해 이 대회 참가자는 우리나라의 박정환 9단과 중국의 커제 9단, 그리고 일본의 시바노 도라마루 7단이었다. 일본은 일인자 이야마 유타 9단이 일정상 참가할 수 없어서 대타가 온 셈이므로 결국 박정환 9단과 커제 9단의 대결이나 다름없다. 1국에서 박정환 9단은 커제 9단에게 역전패를 당했다. 박정환 9단은 2국에서 시바노 7단에게 이긴 뒤에 다시 커제 9단과 결승전을 벌였다. 초반 유리하게 출발했으나 박정환 9단은 중반 역전을 허용한 뒤에 형세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커제 9단이 아마추어 고수들도 범하지 않을 큰 착각을 해서 박정환 9단이 행운의 재역전 우승을 거둔 것이다.
▲ 하세배 결승전 대국 당시 커제 9단은 실수를 깨달은 뒤에 자신의 따귀를 때리고 돌을 뿌리는 등의 나쁜 대국 태도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CCTV에서 이 바둑을 해설하던 구리 9단과 화쉐밍 7단조차 커제 9단의 돌출 행동에 깜짝 놀라서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하기도 했다.
하세배에서 박정환 9단이 우승한 이후에 벌어진 2월의 LG배 결승전은 이미 중국기사들끼리의 결승전이 확정되어 있었고, 농심신라면배 단체전은 이미 중국쪽으로 크게 기운 상태여서 모두 중국에게 우승컵을 내줬다. 그러나 이때의 행운을 기점으로 3월부터의 세계대회는 한국쪽으로 기세가 넘어왔다.
일본은 2011년 후지쓰배를 끝으로 더 이상 메이저 세계대회를 개최하지 않았었다. 자국 선수들이 우승은 고사하고 결승 또는 4강조차 거의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파고의 붐을 타고 인공지능 바둑 개발이 한참 유행하던 시기에 일본은 자국의 딥젠고를 자랑하기 위해 2017년 월드바둑챔피언십을 개최했다. 당시 딥젠고의 기력은 강했으나, 부분적인 오류가 있었고 결과는 박정환 9단의 우승으로 끝났다. 이후 2018년에는 딥젠고를 빼고 규모를 살짝 줄여서 이벤트 기전 형식으로 진행했다. 올해에는 국제대회 예선을 신설한 뒤 본선 8강으로 진행했다. 본선 멤버가 조금 적기는 하지만 예선부터의 참가인원을 생각하면 메이저 세계대회로 충분히 인정할만하다.
월드바둑챔피언십 2019는 일본이 많은 공을 들여서 오래간만에 재개한 메이저 세계대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결승에 오른 기사는 한국과 중국의 기사 박정환 9단과 커제 9단이었다. 바둑 내용은 하세배 결승전과 비슷했다. 출발은 박정환 9단이 좋았으나, 중반에 역전 당했고 종반 커제 9단의 착각으로 재역전, 박정환 9단이 우승했다. 다만 이번 커제 9단의 착각은 하세배와는 달리 쉬운 수의 착각이 아니었고 아주 작은 실수였는데, 박정환 9단이 상대의 미세한 실수를 뚫고 정확하게 응징한 결과로 일군 역전승이었다.
▲ 월드바둑챔피언십 우승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박정환 9단.
이후 4월에는 주니어들만 참가하는 기전이기는 하지만 글로비스배 세계바둑 U-20에서 신민준 9단이 중국의 왕쩌진 6단을 꺾고 우승했고, 6월에는 TV바둑아시아선수권에서 신진서 9단이 중국의 딩하오 6단을 이기고 우승했다. 그리고 춘란배에서는 작년말 예약한 대로 한국기사들끼리 결승전을 치러서 박정환 9단이 우승을 차지했다.
▲ 신민준 9단의 행보도 올해 괜찮은 편이다.(글로비스배 우승 시상식 장면)
이처럼 3월 이후 세계바둑대회에서 우리나라 바둑계는 햇빛이 쨍하고 비치는 상황이다. 5월에 진행된 LG배는 이제 8강까지만 가려진 상태이지만 결과는 괜찮은 편이다. 본선 32강 출발 당시 우리나라가 개최국임에도 불구하고 통합예선 결과가 좋지 않아서 중국의 본선 멤버는 18명, 우리나라는 고작 10명이었는데 지금은 5:3으로 거의 비슷해졌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남은 3명이 랭킹 1,2,3위인 신진서, 박정환, 김지석 9단이고 보면 더욱 믿음직스럽다. 물론 중국도 커제 9단, 천야오예 9단 등의 강자가 남아 있는데, 대진 추첨 결과 우리나라 기사들이 가장 꺼림칙해 하는 커제 9단과 천야오예 9단이 8강전에서 대결하게 되어 있는 점도 우리나라에는 호재이다.
하반기에도 세계바둑대회는 계속 진행된다. 우리나라가 개최하는 대회는 8월에 삼성화재배, 9월 신설대회인 참저축은행배가 있고, 10월말에는 LG배 8강전이 속개한다. 또 중국이 주최하는 몽백합배의 본선이 10월초에 시작하는 등 끊이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쾌청한 한국바둑이 기세를 이어가려면 몇 가지 숙제가 있다.
중국이 커제 9단을 필두로 많은 기사들이 뒤를 받쳐주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세계바둑대회에서 박정환 9단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신진서 9단의 기세가 매우 좋아서 TV바둑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하는 등 기량이 최고조에 올라 있는 만큼 하반기에는 이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박정환 9단은 올해 상반기에만 6억4천5백만원을 벌었다. 사진은 춘란배 시상식.
세계바둑대회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주자인 박정환 9단은 커제 9단에게는 11승 9패로 미세하게 우세를 점하고 있는데 반해, 천야오예 9단에게는 13승 21패로 크게 밀리고 있다. 특히 최근 3년간 7연패를 당하고 있어서 중요 고비 때마다 발목이 잡히고 있는 상황이다. 즉 박정환 9단은 ‘천야오예’라는 숙제를 반드시 풀어야 한다.
한국의 차세대 대표주자인 신진서 9단은 아직까지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 전력이 없다. 그렇지만 최근의 기세를 볼 때 이제는 우승할 때가 됐다. 다만 커제 9단에게 2승 7패, 천야오예 9단에게 2승 6패라는 과거 전적에서 나타난 것처럼 앞으로 이 두 기사를 어떻게 상대할 것이냐라는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 신진서 9단은 현재 18연승 중으로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어서 하반기 세계대회에서 그에 대한 기대가 크다. 사진은 TV바둑아시아선수권대회 시상식.
랭킹 3위 김지석 9단은 지금까지 2번의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이 있다. 1989년생으로 이제 30세(*이창호, 이세돌 9단도 만 30세를 넘긴 이후에는 메이저 세계대회에서 우승 못했다)를 지나가는 만큼 항상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세계대회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의 기량으로 봤을 때 최소 한번 정도는 더 우승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다.
현재로서는 이들 외에 다른 기사의 세계대회 우승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 한국바둑계의 커다란 숙제이다. 이들의 뒤를 이을 강력한 신예기사가 등장해야 한국바둑의 세계제패 역사가 이어질 것이다.
한편, 2019년은 본격적으로 시니어 바둑대회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원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간헐적 이벤트 기전 형식으로 시니어 바둑대회가 있었는데, 올해에는 상반기에만 3번의 시니어 세계바둑대회가 열렸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과거 세계바둑대회가 인기를 모았던 시기에는 한국이 우세하다고는 하지만, 바둑 내용에 있어서는 일본, 중국도 만만치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본 바둑이 몰락을 해서 사실상 항상 한중 대결이나 다름없어졌다. 3강의 대결이 2강의 대결이 되는 순간 바둑팬의 입장에서는 재미가 반감된 것이 사실이다.
▲ 한중일 세계시니어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유창혁 9단(가운데).
그런데, 시니어 바둑대회는 그렇지가 않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바둑계의 주류는 일본이었고, 그 일본에는 대만계 강자들도 많이 활동했었다. 따라서 시니어 바둑대회가 열리면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이 거의 팽팽하게 대결을 펼치기 때문에 더욱 박진감이 넘친다. 실제로 올해 열린 3번의 대회 우승자는 각각 일본 (고바야시 고이치), 한국 (유창혁), 대만 (왕리청)이 돌아가면서 배출했다. 올해에는 중국이 우승하지 못했지만, 녜 웨이핑 9단을 필두로 한 중국 시니어 바둑의 실력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개인전 외에 1번의 단체전에서는 한국팀이 우승)
▲ 1004섬 신안 국제시니어바둑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한 한국팀.
더구나 바둑팬의 입장에서는 아직 어린 기사들의 이름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지만, 왕년의 대스타들의 이름은 아주 익숙하기 때문에 시니어 바둑대회가 오히려 더 반갑기도 하다. 또 주최사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적은 비용으로 비슷한 홍보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시니어 바둑대회라고 굳이 이벤트 대회로만 여길 이유가 없다.
따라서, 향후에는 시니어 바둑대회가 더욱 많이 생겨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아직도 전 세계에 엄청난 팬을 갖고 있는 이창호 9단도 6년 후에는 만 50세가 되어 시니어 대회 참가가 가능해지는데 그때는 시니어 바둑대회의 인기가 한번 더 폭발할 것으로 보인다.
종합해 보면, 2019 상반기 세계바둑대회를 결산해 볼 때 한국은 먹구름이 낀 상태로 출발했으나, 커제 9단의 착각 이후 행운이 붙기 시작해서 현재는 아주 쾌청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세계바둑대회에서 여자대회 부분의 결산은 ③여자대회편에서 할 예정입니다.
▲ 신진서, 최정 9단은 팀을 이뤄 IMSA 월드마스터스챔피언십 혼성페어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한국팀의 바둑부 종합우승을 확정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