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50대에도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을까?
▲ '바둑황제'라는 별칭의 조훈현 9단은 수없이 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고령 대회 우승 기록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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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창호 9단이 농심배 예선 결승에 오르자 많은 바둑팬들이 열광했다. 이창호 9단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일류 기사의 대열에 올라 각종 바둑대회에서 우승을 했었기에 소년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창호 9단은 1975년 생으로 만 44세이다. 오래 된 바둑팬들은 ‘이창호가 벌써 44세!’ 하고 놀라겠지만, 젊은 바둑팬들 사이에서 이창호 9단은 이미 전설로 남아 있을 뿐, 이창호의 전성기를 구경하지도 못했다.
대회 우승을 가리는 결승에 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예선 결승에 오른 것을 갖고 왠 호들갑이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농심배는 363명의 한국기사 중 예선으로 딱 3명 (* 5명을 선발하지만 1명은 랭킹 시드로, 1명은 주최 측에서 지명하는 방식으로 선발한다)만을 선발하기 때문에 농심배에서 예선을 통과하는 것은 국내 대회 우승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이 프로기사들 사이에서의 정설이다. 또한 한,중,일 바둑삼국지인 농심배에서 우리나라가 우승할 확률은 거의 50%, 만약 우승해서 우승 상금 5억원을 선수 5명이 나눠 갖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버는 상금도 농심배 예선 통과는 국내 대회 우승에 버금간다.
그럼 역대 농심배 최고령 출전자는 누구일까? 2006년 8회 농심배 때 와일드카드로 출전했던 조훈현 9단이다. 당시 조훈현 9단은 만 53세, 한국 선수단의 1번 주자로 출전해서 일본의 하네 나오키 9단에게 아깝게 반집을 져서 승리하지는 못했다. 와일드카드는 후원사인 농심이 추천해서 선발된 것이므로 열외로 하고, 자력으로 예선을 통과한 경우의 최고령 출전자는 누구일까? 그도 역시 조훈현 9단이다. 2002년 4회 농심배 예선에서 조훈현 9단은 당당히 5연승으로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에 올랐었다. 조훈현 9단은 1953년 생이므로 당시 만 49세 때의 일이다.
농심배 대표 출전은 국내 대회 우승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어쨌든 국내 대회 우승은 아니다. ‘못지않은’이 아닌 진짜 국내 대회에서 우승한 최고령자는 누구일까? 역시 조훈현 9단일까?
이것이 조금 애매하다. 국내 대회 최고령 우승자의 기록으로는 1973년 고(故) 조남철 9단의 제1회 최강자전 우승으로 남아 있다. 조남철 9단은 1923년 11월 30일 생으로, 1973년 6월 30일에 벌어진 결승 3국에서 김인 9단에게 승리하고 우승했으므로 만 49세 7개월 때의 일이다.
▲ 현대 한국 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9단은 국내 대회 최고령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런데 국내 대회가 아닌 세계대회로 바꾸면 기록이 바뀐다. 조훈현 9단은 1953년 3월 10일 생. 2003년 1월 14일에 제7회 삼성화재배 결승 2국에서 중국의 왕레이 9단에게 이기고 우승을 했으니, 만 49세 10개월에 우승한 것이다. 삼성화재배도 국내 주최 대회이지만 세계대회이다. 조훈현 9단의 마지막 우승이 국내 대회보다 훨씬 어려운 세계대회라는 것이 조금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종합해 보면, 국내, 세계를 가리지 않고 한국 기사 중 최고령 우승 기록 1위는 조훈현 9단, 2위는 조남철 9단이다.
(* 이는 모든 기사들이 참가할 수 있는 종합 기전 성격에서의 우승 기록을 뜻하는 것으로 나이가 많은 기사들만 참가할 수 있는 시니어기전으로 범위를 확대하면 기록은 훨씬 올라가지만 그것은 의미가 다르므로 기록 산정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조훈현 9단의 만 49세 10개월 세계대회 우승은 정말로 대단한 기록인데, 이것이 세계 기록은 아니다. 세계대회 최고령 우승 기록은 일본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 9단이 갖고 있다. 오타케 히데오 9단은 1942년 5월 12일 생. 그는 1992년 8월 1일 제5회 후지쓰배 결승에서 왕리청 9단에게 이기고 만 50세 3개월의 우승 기록을 세웠다. 이후 오타케 9단은 1993년 5월 20일에 서봉수 9단과 치렀던 제2회 응씨배 결승 5국에서 대역전패를 당하며 만 51세 세계대회 우승 기록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50대에도 전성기 때와 비슷한 기량을 과시했었다.
▲ 일본의 오타케 히데오 9단(오른쪽)은 50대 때에도 세계대회에서 20대 기사와 대등하게 겨뤘다. 그는 세계대회 최고령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기록이 있다. 조훈현 9단의 바둑 스승으로 잘 알려진 고(故)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9단은 1925년 6월 14일 생이다. 그런데 일본 서열 1위 기전인 기성전(棋聖戰)을 1기 ~ 6기까지 우승했다. 이것은 1977년 ~ 1982년의 기록으로 50대에 일본 서열 1위 기사였다는 뜻이다. 당시 후지사와 슈코 9단은 “1년에 4판만 이기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는데, 이는 기성전 도전기가 7번 승부로 치러지는 만큼, 다른 시합은 다 져도 기성전 만큼은 계속 방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런 후지사와 9단에게서 타이틀을 빼앗은 사람이 바로 조치훈 9단으로 제7기 때 도전자로 나서서 3연패 후 4연승이라는 대반전으로 역사를 바꿔 놓았었다.
▲ '괴물' 이라는 애칭도 있었던 후지사와 슈코 9단. 67세 때 우승한 기록을 갖고 있다.
후지사와 9단은 만 56세 우승이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1991년 일본 기전 서열 4위 기전인 왕좌전에서 도전자가 되어 하네 야스마사 9단에게 이기고 다시 타이틀을 따냈다. 만 66세 때의 기록이다. 후지사와 9단은 이듬해인 1992년 제40기 왕좌전 도전기에서는 도전자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에게 3:2로 이기며 타이틀을 방어하여 기록을 만 67세로 경신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본격 기전 최고령 우승 기록이다.
이처럼 과거의 기사들은 40대, 50대에도 우승을 차지하는 등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냈었는데, 최근에 들어서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 특히 세계바둑 대회 최다 우승자인 이창호 9단의 전성기가 끝나는 시점부터는 그런 일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창호 9단은 지금까지 총 17번의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으로 역대 최다 우승자이다. 그런데 마지막 우승이 2005년 3월의 제5회 춘란배 우승이었다. 당시 만 29세 7개월, 이후 9번이나 세계대회 결승에 진출했지만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즉 만 30세를 넘은 뒤로는 세계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이다. 반상의 풍운아 이세돌 9단도 마찬가지. 총 14회의 세계대회 우승으로 이창호 9단에 이어 2위를 기록 중인데, 이세돌 9단(1983년 생) 역시 만 29세 9개월이던 2012년 제17회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한 것이 마지막으로, 이후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추가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 바둑 세계대회 최다우승자인 이창호 9단. 지금 44세이지만, 수많은 전설을 남겼던만큼 '이창호'라면 또 다시 우승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여전히 많은 팬들이 기대하고 있다.
즉, 이창호 9단 이후의 기사들은 만 30세가 넘어서 세계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다르게 설명하면 2005년 이후로는 만 30세 넘은 기사가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없다. 이에 대해 많은 바둑 전문가들이 이유를 분석해봤다.
첫 번째는 과거의 기사들은 바둑 공부를 할 때,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10대는 물론이고 20대까지도 계속 수련을 하는 도중이었다. 따라서 기량이 충실해지는 시기가 20대 이후였는데, 요즘은 체계화 된 바둑 교재를 통해 어려서부터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기 때문에 10대에 이미 전성기로 올라설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따라서 과거에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려면 강자 몇 명을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기량이 조금 밑의 선수들과 본선 1,2회전을 뒀었는데, 지금은 예선에서 만나는 모든 선수들이 다 만만치 않기에 모든 시합을 다 결승전처럼 열심히 둬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나이가 많은 기사들이 체력적으로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제한시간의 변화이다. 과거에는 국내 대회는 제한시간 5시간이 보통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시합이 아예 없다. 세계대회도 기본이 3시간이었다. 과거에는 보통 바둑 시합이 끝나고 신문 등을 통해서 기보를 소개했었기에 제한시간이 길어도 상관 없었는데, 지금은 세계대회 등은 대부분 TV를 통해서 생중계 된다. 이런 경우 제한시간이 너무 길면 생중계를 하기 곤란해서 제한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이다. 이런 경우 깊은 수읽기보다 순발력이 더 중요해지는데, 순발력에서 아무래도 젊은 기사들이 훨씬 유리하다는 분석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확한 답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지난 4월 15일 미국의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PGA 메이저대회인 마스터즈에서 우승한 것처럼 바둑계에서도 다시 그런 일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타이거 우즈는 1975년 생으로 메이저대회 우승은 무려 11년 만이었다. 타이거 우즈가 우승 후 그린 자켓을 입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많은 골프 팬들도 같이 울었다.
바둑도 스포츠이지만 골프보다 더 체력을 많이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타이거 우즈와 동갑인 이창호 9단이 또 다시 우승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이창호 9단 이후 고령자 우승이 사라지는 징크스가 생겼지만, 그 징크스를 이창호 9단이 스스로 깬다면 ‘역시 이창호!’라며 또 하나의 전설 같은 얘기가 바둑사에 추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