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송재환(연세대학교4·23)
스스로 미생(未生)이 된 ‘이세돌급’ 바둑천재
“지금도 가끔 생각나요. 어떻게든 바둑을 시켰어야 했는데… 여태 봤던 천재 중 최고였어요. 이세돌보다도.”
그를 가르쳤던 기린아 바둑도장 김항 원장의 말.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김항 원장의 목소리는 몹시 비통했다. 김항 원장은 오래 전 어린 이세돌의 천재성을 목격한 뒤 충격을 받아 프로를 지망했던 아들의 바둑수업을 포기했던 바 있다.
중학교 진학 이후 홀연히 바둑계를 떠났던 송재환(연세대학교4·23) 씨는 스무살 성인이 되어 2015년 한화생명배 15주년 기념 역대 우승자 초청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행사에서 신민준, 나현 九단과 한자리에 선 그는 6회 대회 유단자부 우승, 7회 대회 국수부 준우승, 8회 대회 국수부 우승자다.
이후 3.15의거배, 신안천일염 대학생 바둑대회 등 지방 작은 대회 입상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세돌과 비견됐던 천재소년 송재환. 그는 왜 바둑을 그만뒀으며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송재환 씨가 재학하고 있는 연세대학교를 찾아갔다.
- 반갑습니다. 1년 만인가요?
“2018년 3·15의거배에서 뵀으니까… 그쯤 됐겠네요.”
- 당시 우승 인터뷰 하려고 휴대폰 번호를 받았는데 이제야 만나게 됐네요. 4년 전에도 한 번 뵀던 적이 있죠? 한화생명배 역대 우승자 초청 이벤트에서요. 기억나시죠?
“그럼요. 한화생명배는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더욱 기억이 생생해요. 4학년 때 유단자부를 우승하고 5학년 땐 국수부 준우승, 6학년에 비로소 우승했으니까요. 정말 뛸 듯 기뻤죠.”
- ‘한화생명배 우승자=프로입단’이라는 공식이 있는데요. 오히려 우승 후 중학교 진학 전 바둑 공부를 그만뒀다고요.
“그땐 정말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한화생명배 때문에 더 고민이 깊어졌던 것 같아요. 많이 아쉽긴 했지만 바둑은 취미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 이유가 궁금한데요.
“바둑을 정말 좋아했지만 질 때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지면 항상 울었어요. 대회에서 떨어지면 눈물을 뚝뚝 흘렸던 기억이 나요. 가장 큰 이유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고 싶었어요. 바둑 특기생으로 진학하면 학교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게 걸려서. 물론 프로가 된 이후에도 마음 먹고 공부하면 대학은 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학창시절이 돌아오진 않잖아요.”
- 송재환 씨가 바둑을 그만 둔 이후로 기린아바둑도장 김항 원장이 “이세돌보다 뛰어난 인재를 놓쳤다”고 탄식했다고 들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칭찬인 것 같은데요. 바둑이 좋아서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긴 했어요. 그거 하나는 자부해요. 만약 계속 했으면 프로는 됐을 것 같은데… 최고가 됐을지는 모르겠어요. 세상에 재밌는 게 너무 많아서요. 영화도 봐야 되고, 축구도 봐야 되고, 게임도 해야 되는데….(웃음)
- 김항 원장의 말에 의하면 학교공부도 굉장히 잘 했다고요.
“오해가 있으세요.(웃음) 초등학생 때는 평균 80~90점정도? 그냥 평균보단 조금 높은 정도였죠. 중학생 때도 비슷했고요. 고등학생 때는 그래도 상위권에 있었던 거 같아요. 반에서 5~6등?”
- 연세대학교에 진학했으니 바둑으로 치면 학교공부로 입단한 셈인데 만족하나요?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아요. 1년 재수했는데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바둑 생각이 나더라고요. 바둑은 한 가지만 신경 쓰면 그만인데 학교는 졸업하고 진로가 너무 많아서 그것도 고민이고요. 하지만 바둑을 뒀더라면 졌을 때 역시 공부나 할 걸 생각했겠죠.(웃음) 지금은 세계 여행도 다니고 학교 동아리 활동(특히 연세대 유일 체스동아리 ‘스테일메이트’를 강조)도 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 바둑 공부를 했던 게 도움이 된 점이 있나요?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점입니다. 미리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두면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죠. 바둑이 차근차근 순서대로 효율적인 수를 추구하듯 일상도 비슷한 것 같아요. 부분에 얽매이지 않고 큰 그림을 볼 수 있달까? 부분에서 이득 본다고 바둑을 이기는 게 아니잖아요. 드라마 ‘미생’은 오버(?)가 좀 심하지만 실제로 도움이 되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 요즘 아마추어 대회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고 계신데요. 상금도 쏠쏠(?)히 챙기고 계시고요.
“하하, 시간과 조건이 맞는 대회만 나가요. 학업에 지장을 안 주면서 같이 나갈 사람이 있을 때만. 덕분에 아르바이트는 안 해도 돼서 좋습니다. 종종 바둑이 두고 싶을 때가 있는데 대회에 나가면 해소가 되기도 하고요.”
- 앞으로의 꿈과 목표가 궁금합니다.
“아직 구체적인 건 없어요.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은 경험을 해본 뒤 목표를 찾고 싶어요. 훗날 학교를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제가 바둑 둘 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사람마다 제각각 가진 특성이 있는데 그게 바둑과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마다 다른 천재성을 키워줄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다른 건 몰라도 바둑 천재는 제가 누구보다 잘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터뷰/김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