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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 영화와 바둑 

등록일 2021.07.021,213

1993년 개봉한 <백발마녀전> 포스터와 기다림으로 세계를 제패한 이창호 九단.
1993년 개봉한 <백발마녀전> 포스터와 기다림으로 세계를 제패한 이창호 九단.

기다림의 미학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벤자민 프랭크린은 기다리는 자만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다림이란 인내이며, 곧 믿음이다. 결국은 내가 이길 것이며,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란 믿음없이 기다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미 없는 약속 하나를 믿고, 떠나간 연인을 속절 없이 기다리는 연인의 이야기는 어리석은 미망이지 결코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기다린다는 것은 완벽한 자기 확신이며, 강인한 인내인 셈이다.

기다림으로 세계를 제패한 기사가 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이창호다. 그는 무수히 많은 승패의 시간 속에서 기다리고 기다림으로 승리를 얻어냈다. 섣부른 해설가들은 TV 중계 속에서 떠들었다. 지금은 나아가야 할 때지 물러설 때가 아니라고. 기세를 위해서 젖혀야 한다고. 집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깊숙이 뛰어들어야 한다고. 그러나 돌부처는 말없이 물러선다. 한가한 곳에 돌을 옮기고, 물끄러미 판을 응시한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한다.
 
사람들은 그의 천재적인 계산능력을 이야기한다. 신산이라고 말하며, 반집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기사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기다림이라는 인내와 믿음에 있었다. 자기자신을 믿는 자만이 남을 흔들 수 있다. 마치 절벽을 향해 차를 달리다 마지막으로 멈추는 자가 승리하는 치킨게임처럼, 공포를 느끼는 자가 먼저 브레이크를 밟기 마련이며, 실수하기 마련이다. 바둑은 묘수가 아닌, 실수가 적은 자가 이기는 게임임을 오늘날 인공지능이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이창호는 ‘그때’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93년 장국영, 임청하 주연으로 개봉한 영화 <백발마녀전>의 오프닝은 꽤나 인상적이다. 눈 덮인 산에 한 남자가 죽은 듯이 앉아 있다. 곧이어 황제가 보낸 무사들이 도착한다. 무사들은 중병에 걸린 황제를 구할 약초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 약초의 주인은 따로 있다며 그들에게 그 약초를 양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황제를 위해 약초를 차지하려는 무사들을 모두 베어버린 남자는 다시 그 자리에서 누군가를 한없이 기다린다.

명나라 말기 서로 원수인 문파들에 속해 있음에도 사랑에 빠진 탁일항과 연하상. 둘은 세상의 편견을 넘어서서 둘만의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나 사소한 오해로 인해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칼을 들게 되고, 상심한 연하상은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린 채 어디론가 떠나가버린다. 남겨진 탁일항은 그녀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한 채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려 놓을 수 있는 약초를 지키며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리고 말한다. 이 약초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그녀가 어디 있는 지 알게 되어 찾으러 가기 전까지 이 곳에서 약초를 지키며 기다리겠다고.

홍콩영화의 전성시절, 최고 인기 배우였던 장국영과 임청하를 내세웠던 영화 <백발마녀전>은 신비로운 이야기와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가져온 듯한 비극적인 설정, 그리고 멋진 무협액션으로 히트를 거두었다. 그러나 3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앞서 설명한 영화의 강렬한 오프닝 씬이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그 곳을 알게 될 때까지 이 곳에서 기다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묘하게도 이창호의 바둑과 닮아 있다. 승리의 승부처가 어디인지 알 순 없다. 그러니 기다린다. 기다리면 바람이 소식을 전해올 것이다. 그녀가 어디에 있다고, 상대의 실수가 어디에 있다고.

전성기의 이창호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시장 불량배들의 가랑이 밑을 기는 한신의 이야기까지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는 수많은 훈수꾼들의 속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를 믿으며 기다렸다. 그가 이룩한 그 위대한 전과들은 바로 그런 인내와 자기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홀로 흔들리지 않는 기다림이 가져다준 달콤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위대한 기사 이창호를 떠올리며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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