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 최정, 반상 역사를 새로 썼다
‘바둑 여제’최정(26) 九단이 반상(盤上) 역사를새로 썼다.
여자기사로는 사상 처음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진출을 이뤄낸 끝에 삼성화재배 준우승컵을 품에안은 것. 루이나이웨이(芮乃偉) 九단이 1992년 2회 응씨배 4강에 진출했던 여자기사 최고 성적을무려 30년 만에 갈아치웠다.
비록 챔피언의 영예는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됐지만 여성 최초 메이저 세계대회 준우승은 그동안 고생한 최정이 자기 자신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자기사로는 사상 처음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진출을 이뤄낸 끝에 삼성화재배 준우승컵을 품에안은 것. 루이나이웨이(芮乃偉) 九단이 1992년 2회 응씨배 4강에 진출했던 여자기사 최고 성적을무려 30년 만에 갈아치웠다.
30년 만에 갈아치운 여자기사 최고 성적
10월 27일 본선32강으로 시작을 알린 2022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가 11월 8일 결승2국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번 대회 히로인은 단연 최정이었다. 대회 기간 보인 최정의 활약에, 그 반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두 번의 준우승 끝에 우승한 신진서 九단에게 쏟아져야 마땅한 스포트라이트가 오히려 준우승한 최정 九단에게 더 쏠렸다.
한 중국 네티즌은 ‘최정과 커제(柯潔)를 결혼시켜 최정을 중국 대표로 출전시키자’는 황당무계한주장까지 했을 정도다. 그만큼 여자 선수의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 진출은 메가톤급 사건이었다.
최정은 삼성화재배 국내선발전 여자조에서 5연승하며 3년 만에 삼성화재배 다섯 번째 본선에 합류했다. ‘여성 최강’ 최정의 여자조 티켓 획득은 어쩌면 통과의례였는지도 모른다.
대회규정에 의해 의당 거쳐야 하는 수순이었고, 이는 좀 더 매력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찾는 미디어에 별반 뉴스거리도 안 되는 당연한 일이었다. 최정이 중도에 떨어졌으면 그게 오히려 뉴스였을 것이다.
최정의 최종 목표는 국내선발전 여자조 통과가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꿈꿔왔고 가장 이루고 싶었던 원대한 목표가 ‘삼성화재배 우승’이라는 걸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삼성화재유성캠퍼스를 뛰어다니며 국내외 선후배 기사들과 어울렸던 추억이 최정 머릿속에는 아련한 노스탤지어(nostalgia)의 손수건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리라.
국내선발전 5연승에 본선 4연승 보태 결승행
본선32강과 16강에서 일본의 사다 아쓰시(佐田篤史) 七단과 이치리키 료(一力遼) 九단에게 승리한 최정은 한 걸음 한 걸음 예열을 마쳤다.
오사카(大阪) 관서기원 소속인 사다 아쓰시는국내 팬들에게 생소한 이름이지만 2020년 신인왕전 준우승과 본인방(本因坊)전 본선 리그를 두차례 뛴 유망주. 이 정도 레벨의 선수에게 최정이 승리한 것은 이변도 아니었다.
공식 대회에서 처음 마주친 이치리키 九단은 일본서열 1위 기전인 기성(棋聖) 타이틀 보유자다. 최정은 대국 내내 고전을 면치 못하다 이치리키의수순 착오를 응징하며 대마를 포획했다. 마지막까지 혼전의 연속이었지만 집중력에서 앞선 최정이 본인의 첫 메이저 세계대회 8강 기록을 작성했다.
이번 대회 전까지 LG배 2회(2016·2019년), 삼성화재배 1회(2018년) 등 세 차례 16강에 올랐지만 번번이 8강 문턱에서 주저앉았던 최정이 드디어 본인의 커리어를 새로 썼다.
세계챔피언 출신 양딩싱 격파
8강에선 중국랭킹 5위 양딩신(楊鼎新) 九단을완파했다. 양딩신이 누구던가. 2019년 23회 LG배에서 우승한 세계 챔피언 출신이며, 세계대회준우승을 두 번이나 차지할 정도로 중국이 자랑하는 에이스 중의 에이스가 아닌가(양딩신은 삼성화재배 직후 열린 27회 LG배 4강에서 신진서 九단까지 꺾고 결승에 올라있다).
최정은 108개월 연속 국내 여자랭킹 1위 기록(11월 25일 현재)을 질주 중이다. 108개월 하면 선뜻 와 닿지 않지만, 연(年)으로 환산하면 정확히 9년이다. 여자기사로 범위를 좁히긴 했어도 9년 동안 내내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여자랭킹 부동의 1위였지만 당시 한국 전체랭킹에서는 30위에 불과했던 최정이 양딩신에게 승리한다는 걸 예측한 이가 얼마나 됐을까.
최정의 승리는 우리 선수들의 4강 독식으로 한국의 우승까지 확정짓는 한판이기도 했다. 한국의 메이저 세계대회 여섯 번째 4강 독점을 최정본인 손으로 결정지었다. 그동안 LG배에서 네 차례, 후지쓰(富士通)배에서 한 차례 나왔지만 삼성화재배에서는 처음 나온 쾌거였다.
대업을 이룬 최정의 국후 인터뷰에 바둑팬들은환호했다.“이렇게 미친듯 이기고 싶은건 오랜만이었다.”
반면 자국 선수의 4강 전원 탈락에 중국 언론도난리가 났다.한 인터넷 매체는 “중국바둑의 암흑 시기였던 1996년부터 2004년까지도 한국 선수들이 삼성화재배 4강을 모두 차지한 적은 없었다. 가장 치욕스러운 결과”라고 한탄했다.
4강에서 변상일 5연패 사슬 끊고 결승행
8강 직후 열린 조 추첨에서 최정의 4강 상대는변상일 九단으로 결정됐다.
격전을 치러 몸은 파김치가 됐는데, 8강 바로 다음날 강적 변상일과 4강을 다퉈야 했다. ‘최정돌풍은 여기까지’라는 게 당시 현장 분위기였다. 국내랭킹 2위 변상일과의 맞대결 전적이 5전 전패, 단 한 차례도 판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승세의 최정을 변상일도 막아서지 못했다. 스무 개가 넘는 중앙 대마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닥치자 변상일은 연신 눈물을 훔쳐야 했다. 중앙 대마가 잡힌 걸 확인한 변상일이 돌을 거두며 최정이 169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뒀다(관련상보 46쪽).
1988년 세계바둑대회가 창설된 이후34년 만에 여성기사 최초의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 진출을 최정이 완성했다. 세계 바둑사에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결승 진출을 확정지은 최정은 “지금 진짜 좀 현실감이 없다. 최근 2주간 제가 좀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면서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 진출에 본인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역대급 ‘대마 사냥꾼’ 변신
스승 유창혁 九단의 영향이었을까. 본선 네 판 모두 역대급 대마 사냥꾼으로 변신한 최정은 4경기에서 잡은 대마의 돌 갯수만 85개(32강 19개·16강 34개·8강 11개·4강 21개)에 달했다. 최정의 무시무시한 공격력에 신진서도 이를 의식하는 인터뷰를 했을 정도였다.
“최정 선수와의 전투가 솔직히 두렵다. 최대한 피해 다니겠다.”
삼성화재배 본선에서 보여준 최정의 강렬한 인상을 우회적으로 엿볼 수 있게 한 이 말은, 4강 승리 직후 신진서가 남긴 한마디였다.
최정 九단이 끝없이 날아오른 끝에 삼성화재배 결승에 선착했다. 예선 5연승, 본선 4연승, 9연승 행진 끝에 결승에 안착했다.
특히 8강과 4강에서 보여준 최정의 퍼포먼스는 전 세계 바둑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짜릿함을 선사했다.
최정의 결승 상대는 삼성화재배 2연속 준우승으로 그 누구보다 우승에 목말랐을 신진서. 국내랭킹 1위 신진서와 국내 여자랭킹 1위 최정의 결승3번기를 바라보는 우리 바둑팬들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흐뭇했고 마음 편했다. 누가 이기면 어떠랴. 우리 선수들의 우승인 것을!
‘별들의 제전’, 메이저 결승 첫 성(性)대결
이미 보도된 것처럼 ‘바둑여제’의 무한질주는 ‘신공지능’에 막혀 준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유독 삼성화재배에서 마음고생을 한 신진서도 종합전적 2-0으로 월드바둑마스터스의 타이틀 수상자 란에 이름을 올렸다.
13일간의 지상 최대 바둑쇼가 막을 내렸지만그 여운은 계속됐다. 신진서의 ‘2전 3기’ 챔피언 등극, 한국 전원 4강 진출, 중국 부진, 한국 2연패 등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이야기거리를 양산한 ‘별들의 제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최정의 메이저 세계대회 첫 결승 진출이었다.국내는 물론 라이벌 중국과 일본 언론 등에서도 최정의 결승 진출은 단연 화제의 중심이었다.
우승컵은 신진서에게 돌아갔지만 관심은 오히려 준우승한 최정에게 더 쏠리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최정의 결승 진출은 두고두고 회자될 쾌거 중의 쾌거였다.
비록 챔피언의 영예는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됐지만 여성 최초 메이저 세계대회 준우승은 그동안 고생한 최정이 자기 자신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시상식 직후 인터뷰에서 남긴 최정의 한마디가 이번 준우승이 ‘라스트 댄스’가 아닐 것이라는 울림을 남겼다.
“이번 대회를 통해 제 한계는 제가 정하는 것이라 깨달았다. 더욱 정진해 더 좋은 모습으로 도전하겠다.”
4강 진출로 차기 본선 시드를 확보한 최정의 다음 삼성화재배 행보가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