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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019 삼성화재배를 지켜보며 

등록일 2019.12.13926

▲ 2019 삼성화재배 프로암 대회에서 최정 9단과 대국한 김태훈 팝칼럼니스트.
▲ 2019 삼성화재배 프로암 대회에서 최정 9단과 대국한 김태훈 팝칼럼니스트.

칼럼/2019 삼성화재배를 지켜보며

황제는 다시 돌아온다

■글 _ 김태훈(팝 칼럼니스트)

지난 9월 6일 2019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가 막을 내렸다. 올해 스물네 번째를 맞는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의 우승은 중국의 탕웨이싱에게 돌아갔다. 한국선수들은 8강을 넘지 못하고 전원 탈락해 국내 바둑 팬들에게 깊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우울한 결과는 우울한 예언을 불러왔다. 일각의 예상임을 빌어 내년 삼성화재배의 개최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KBS라는 메인 후원사가 중계를 포기함으로 가져온 충격의 연장선에서의 여파일 것이다.

1996년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으로 시작된 제1회 대회의 우승자는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였다. 그러나 1997년 제2회 대회부터 한국의 약진이 시작됐다. 20세기 말의 맹주 이창호의 3년 연속 우승을 시작으로 2000년 밀레니엄의 첫 우승자 유창혁, 이어 조훈현의 2001년과 2002년으로 이어지는 우승으로 한국은 세계바둑의 최강시대를 열었다.

2003년 제8회 대회의 우승은 일본기원 소속인 조치훈 九단이었지만, 심정적으론 이 역시 한국기사의 우승이었다. 2004년 제9회 대회는 21세기 초의 독보적인 천재기사 이세돌의 우승이었고, 몇 년간의 아쉬운 순간들을 지나 2007년 제12회 대회를 다시 시작으로 2008년까지 이세돌은 세 번의 우승 영예를 얻었다. 2011년 원펀치 원성진 九단의 우승, 2012년 돌아온 이세돌의 네 번째 우승, 그리고 2014년 김지석 九단의 우승으로, 이름만 바뀌었지 우승국가엔 대한민국의 국적이 선명히 새겨졌다.

그러나 2015년부터 올해까지 지난 5년간의 우승은 온전히 중국의 것이었다. 어디 삼성화재배 하나뿐일까. 농심신라면배와 같은 국가대항전부터 소위 메이저라 불리는 대회에서 한국기사들의 이름을 찾기가 과거에 비해 쉽지 않아졌다.


기업은 이익이라는 이기를 추구하는 냉정한 단체다. 승부를 통해 영예를 얻는 바둑도 반집으로 판명 나는 승패를 떠올리면 잔혹함에 있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런 차가운 기업과 승부의 관계가 24년을 같이 동행해 온 것은 분명 미덕이지만 성과 없는 지난 몇 년을 떠올려보면 이제 결별의 순간이 온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스포츠라는 검투사들의 살벌한 승부와 기업이라는 감정 없는 냉혹한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이런 대차대조표의 분명한 손익 속에서만 관계가 맺어져 온 것일까?

미국의 유명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가 골프 전문 라인을 만들겠다고 발표했을 때,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골프 전문 브랜드들과 전통적인 골프 팬들은 큰 소리로 비웃었다. 기껏(?) 조깅화나 만들어 팔던 나이키가 골프라는 고급스런(?) 스포츠에 뛰어든다는 것이 말이나 되냐는 듯이.

그러나 이 신출내기 골프 브랜드에는 단숨에 판을 뒤집을 비장의 묘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골프 신동 타이거 우즈였다. 나이키의 후원을 받은 타이거 우즈는 고루한 골프의 이미지를 탈피한 새롭고 젊은 감각의 CF들을 선보였고, 나이키의 로고가 선명히 박힌 모자와 의상을 입은 채 PGA에서 승승장구했다.

골프 브랜드 시장의 판세는 단숨에 역전됐다. 전통의 골프 전문 브랜드들은 나이키라는 앙팡테러블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넘겨준 채 무참히 유린당했다. 타이거 우즈의 세상이었고, 나이키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신의 영역까지 다가갔던 황제는 어느 날 한낱 인간이었음을 드러냈다. 연이은 성적 침체와 낯 뜨거운 섹스 스캔들이 터지며 태양에 가장 근접하게 날았던 골프 황제는 처절히 추락했다. 그를 옹립하며 찬양했던 팬들이 제일 먼저 등을 돌렸고, 셈이 빨랐던 협찬사들도 자신들의 로고를 하나씩 회수해 갔다. 마침내 타이거 우즈에겐 나이키만이 남았고,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진 가운데 나이키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세상 모두가 나이키마저 몰락한 황제의 곁을 떠날 것이라고 믿었던 순간, 나이키는 말했다.

“나이키는 기다린다. 황제가 돌아올 때까지.”

나이키의 이 한 마디는 골프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먼저 떠나간 이들은 줏대 없는 장사꾼들이 되어버렸고, 나이키는 의리를 지키는 기업의 이미지를 덤으로 얻었다. 그러나 황제는 말이 없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또 몇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타이거 우즈는 이제 그저 그런 선수가 되어버렸으며, 나이키의 믿음은 친구대신 십자가에 매달린 채 오지 않을 그를 기다리는 우화 속의 누군가가 되어버린 모양새였다.

2019년 4월, PGA 사무국은 투어의 첫 메이저대회 우승자로 타이거 우즈의 이름을 알렸다. 마침내 황제가 돌아온 것이다. 11년 만의 우승, 그리고 마스터스 기준 14년 만의 우승이었다. 전성기에 비해 숱이 적어진 머리였고, 우승의 포옹을 그의 아버지가 아닌, 그의 아들과 나누는 장면이 낯설었지만, 황제는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티셔츠에는 선명하게 나이키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미디어는 나이키가 타이거 우즈의 우승으로 거두어들인 금전적 효과를 약 255억이라고 계산했다.

나이키의 승리는 결코 그 돈의 액수에 있지 않다. 골프를 치는, 그리고 골프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죽음보다 어렵다는 의리를 지킨 나이키가 있었다는 것을. 지난 몇 년 동안의 PGA 우승자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는 이들도 이 믿기 힘든 동화만큼은 꽤 오랫동안 즐겁게 이야기할 것이다.

찾아보면 흥미로운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다. 1899년 창단한 스페인의 축구팀 FC 바르셀로나는 축구를 종교로까지 여기는 열혈 팬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즐겨 FC 바르셀로나의 슬로건을 이야기한다. ‘클럽 그 이상의 클럽’. 축구를 숭배하는 FC 바르셀로나의 유니폼 앞에는 어떠한 후원사의 로고도 새길 수 없었다. 신성한 축구의 정신을 상업적인 로고로 훼손시킬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2006년 여름 FC 바르셀로나는 팬들에게 자신들도 이제 시대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으며, 그래서 후원사의 로고를 유니폼에 달기로 했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흥분한 팬들은 선수들이 바뀐 유니폼을 입기로 한 첫 날 경기장에 집결했고, 곧이어 상업 로고를 단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등장할 때 던질 계란과 토마토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선수들이 입장을 시작했을 때, FC 바르셀로나의 팬들은 손에 들었던 계란과 토마토를 내려놓은 채 기립박수로 그들을 맞이했다. 유니폼의 앞면에는 선명한 글씨로 UNICEF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기업의 로고를 새기는 스폰서십의 관례에서 벗어나 FC 바르셀로나는 150만 유로, 약 20억의 기부금을 거꾸로 유니세프에 기부하며 자신들의 유니폼에 그들의 로고를 새겨준 것이었다.

이 사건은 클럽 축구를 떠나 세계 축구사의 전설이 되었고, FC 바르셀로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린 기업이 되었다. 2013년부터 축구팀의 운영을 위해 기업의 후원을 받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의 유니폼에는 유니세프의 로고가 자리 잡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자인 코맥 메카시의 또 다른 소설 <더 로드>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파멸해버린 지구에서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 헤매는 아버지와 아들의 여정에 빨간색 로고의 음료 하나가 실명을 드러내며 보이기 때문이다. 알루미늄 캔에 든 그 음료를 맛있게 먹는 아들의 모습과 그 음료의 상징과도 같은 색감은 온통 회색으로 묘사된 우울한 미래의 풍경에서 유독 도드라지게 튄다.

예상하듯이 음료의 이름은 코카콜라이다. 코맥 메카시는 작가로서 자신이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대가 없이 자신을 후원해준 코카콜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이 장면을 소설에 넣었다고 고백했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와버린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물론 아무런 근거 없는 호사가들의 우울한 추측일 뿐이다. 그럼에도 올해 삼성화재배는 그 어느 해보다 한국의 우승을 기대했기에 그 실망과 함께 많은 생각들을 떠올리게 한다. 황제들은 돌아올 것이며, 바둑은 여전히 게임 그 이상의 게임이고, 승부는 힘들었던 시대의 순간마다 우리에게 기쁜 소식들을 전해왔다. 그리고 그런 즐거움들이 오랫동안 계속되길 바둑 팬의 한 사람으로서 바란다. 철학이 있는 기업과 불멸의 승부사들의 아름다운 동행이 영원히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김태훈 팝칼럼니스트>

팝 칼럼니스트, 아마추어 바둑인, 커피 애호가, 작가, 인터뷰어. 현재는 책 소개 유투브와 대중문화 강연, 그리고 한국기원 옆 카페 유전의 아르바이트를 생업으로 하고 있다.
김지명 바둑캐스터와의 인연, 그리고 한국기원의 초청으로 2019 제24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의 개막식에 초대된 것이 가문의 영광이었음을 고백한다. 최정 九단의 열렬한 팬으로 언젠가 그녀가 커제와 탕웨이싱을 넘어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할 것을 일말의 의심 없이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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