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스타/박건호 四단
내일은 스타/바둑리그 개막전 히어로 박건호 四단
한계를 넘고 싶다!
누구라도 긴장됐을 한 판이다. 우리나라 최대기전의 개막전, 그것도 바둑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2시간짜리 장고대국이었다. 신예기사 박건호 앞에 바둑리그의 터줏대감 김지석이 마주앉았다.
대개의 경우 스포츠에서 ‘언더독’은 상위랭커에 비해 부담 없이 경기를 펼치기 마련인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작년까지 한국물가정보 소속으로 활약했던 박건호는 올해부터 포스코케미칼의 유니폼을 입는다. 여기엔 약간의 사정이 있는데 그건 곧이어 소개하도록 하고, 바둑리그에선 흔치 않게 ‘방출과 이적’ 이슈로 선수선발식에서부터 박건호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새롭게 둥지를 튼 팀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싶었을 한 판이었다.
염원이 이뤄졌다. 동경하던 대상, 그것도 열 합 가까이 겨뤄 한 번도 재미를 보지 못했던 대선배에게 거둔 꿀맛 같은 첫 승이었다. 한국바둑계에 ‘박건호도 있다’는 걸 알린 멋진 승부였다.
“저를 인터뷰 하신다고요? 뭐 저야 좋긴 합니다만, 그런데 무슨 이유로…?”
승부를 업으로 하는 프로기사들치고 바둑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만, 바둑계에서 인터뷰 기사가 실리기 위해선 꽤 그럴듯한, 그러니까 독자들이 봤을 때 납득할 만한 성적을 내야한다는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승자만 인터뷰한다면 독자들은 만날 박정환·신진서 소식만 접해야 하는데, 매번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도 피곤한 일이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다소 중복인 감이 있다.
오늘의 스타가 아니라 <내일은 스타>를 조명하는 코너라는 취지를 알렸다.
“이 코너에 나온 이상 향후 꼭 스타가 돼야겠는데요(웃음).”
부드럽고 힘 있는 바둑만큼이나 말솜씨에서도 재치가 묻어나는 박건호 四단을 만났다.
- 바둑리그 개막전에서 거함 김지석 九단을 꺾어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소감은?
“상대가 던지려고 했을 때, 그 순간을 당분간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정말 가슴이 쿵쾅쿵쾅, 제 심장 소리가 방송에 들리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김지석 九단은 제가 동경하던 선배 기사입니다. 국가대표 상비군 리그전에서의 대국까지 합치면 대략 10판 가까이 뒀는데 아직 한 판도 못 이겼던 상대였고요.”
- 김지석 九단은 평소 바둑계에서 칭찬이 자자한 기사이긴 하죠. 어떤 면에서 동경하는 기사인가요?
“우선 후배 기사들을 평소에 많이 챙겨주셔서 항상 고마운 마음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국가대표 상비군 선수들에게 고기도 자주 사주시고(웃음), 특히 저랑은 배드민턴이라는 공통 분야가 있어요. 최철한 九단, 홍무진 四단 등과 함께 네 명이서 배드민턴도 많이 쳤습니다. 평소엔 그렇게 따뜻하신 분인데, 바둑판 앞에서는 자비가 없어요. 그동안 판 맛을 못봐 대국할 때마다 너무 무서웠죠.”
- 속기도 아니고 이번 시즌 처음 도입된 2시간짜리 장고대국에서 승리했어요. 10연패나 당했던 천적을 꺾은 비결이 있을까요?
“제 기풍이 공격적인 편은 아닙니다. 두텁게 두다가 기회가 왔을 때 받아치는 스타일인데요, 말하자면 카운터펀처랄까요. (김)지석이형이랑 둘 때도 항상 그런 방식으로 둬왔던 것 같아요. 원래 자신보다 센 사람과 두면 과감하게 달려들어야 하는데 저는 제 스타일로 밀고 갔던 거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게 패인이 아니었나 싶더라고요. 이번 대국에선 평소와 달리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강공을 펼친 게 주효했습니다. 뭔가 변화를 주고 싶었는데 그 전략이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 초반부터 줄곧 앞서나갔던 바둑인데, 나중엔 인공지능조차 하나마나한 승률 분석(50대50)을 내놓을 정도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활 싸움이 됐어요.
“이제 와서 얘기하는 거지만 중앙 대마가 끊겼을 때는 ‘아 결국 이렇게 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상대가 창작사활집을 내실 만큼 수읽기로 워낙 정평이 나 있는 기사잖아요. 패가 나도 안 되고 그냥 살아야 이길 수 있는 승부라 눈앞이 깜깜했죠. 2시간 대국이라 그 시점에서 지석이형의 시간이 꽤 많았는데 30분 정도를 대마 잡는 수를 찾는데 투입하면서 60초 1회의 초읽기에 몰리게 됐어요. 그전까진 완벽한 공격이었는데 갑자기 마지막 초읽기에 몰린 이후 상대가 약간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깔끔하게 살기도 힘든데 너무 예쁘게 살았죠(웃음). 덕분에 이렇게 월간 『바둑』 인터뷰도 하게 됐으니 천운이 따른 것 같네요.”
-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었을 가족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입단 전부터 서울로 바둑 유학을 와서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요, 최근엔 아예 방을 하나 얻어서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가족들과는 전화 통화를 했는데 어머니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달리 굉장히 하이톤이었어요. ‘올해는 뭔가 될 것 같다. 너도 이제 때가 온 것 같다’며 좋아하셔서 덩달아 기쁘더라고요. 이제 시작이니 더 잘해야죠.”
- 슬슬 바둑리그 선수선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가 온 것 같네요.
“역시 그 얘기인가요(웃음)? 요즘은 어딜 가나 그 이야기만 해서 사실 저도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 2년 전 바둑리그에 데뷔할 때 한국물가정보의 한종진 감독이 4지명으로 발탁하면서 화제가 됐었어요. 지금도 한국물가정보에 그대로 있는 박하민 선수는 당시 5지명이었죠. 헌데 이번에 한종진 감독의 선택이 의외라는 분석이 많았습니다. 박하민 선수를 4지명으로 올린 건 그렇다 치더라도, 박건호 선수를 방출하고 퓨처스리거였던 안정기 선수를 5지명으로 보유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죠.
“사실 선수선발식 전에 한종진 사범님께 연락을 받았습니다. (방출하게 돼서) ‘미안하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솔직히 조금 서운했어요. 하지만 드래프트가 끝나고 포스코케미칼에 4지명으로 선발되고 나니까 막상 아무렇지 않더라고요. 지난 2년간 함께한 한국물가정보도 정말 좋은 팀이었지만 포스코케미칼도 훌륭한 팀이니까요. 혹시 앙금이 남은 게 아니냐는 분들도 많이 계신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2년 전에 저를 바둑리거로 뽑아주셨던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 덕분에 박건호 선수를 얻은 포스코로선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기분이겠는데요. 팀에서도 잘해주실 것 같아요.
“한국물가정보와 포스코케미칼의 팀 컬러가 확연히 다릅니다.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물가정보는 한마디로 하면 ‘같이 호흡하는 팀’이에요. 팀장님도 자주 찾아오시고 심지어 노영현 대표님도 시간 되실 때 종종 오셔서 함께 검토하고 밥도 사주시거든요. 이런 스타일이 확실히 정겹고 가족 같긴 한데 부담이 될 때도 없지 않죠. 반면 포스코는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스타일입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선수들에게 주는 부담을 최소화 하면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시는 느낌이죠. 두 팀 모두 바둑리그 명문 구단인 만큼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네요.”
- 이제 바둑팬들에게 서서히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기사가 되고 싶나요?
“음… 사실 이런 건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웃음). 한계를 넘어서는 기사가 되고 싶어요. 솔직하게 얘기해서, 제가 정상권에 가기엔 주위에서 봤을 때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어요. 초일류 기사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부분은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타협을 한 상태입니다. 지금은 초일류 기사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바둑계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질 수만 있다면 말이죠. 물론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거죠. 예전 같이 몇 년 안에 세계대회에서 우승하겠다, 이런 건 이제 식상하잖아요?”
<이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