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슬픈 드라마다!” 면도날 사카다 九단과 <타짜>
“화투는 슬픈 드라마야.”
영화를 보다 등장인물의 대사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다. 화투를 소재로 했던 최동훈 감독의 영화 <타짜>에 사용된 대사이다. 화투를 배워 돈을 벌고 싶어하는 고니(조승우)에게 그의 스승인 평경장(백윤식)이 내뱉는 말이다.
1963년의 어느 날로 돌아가본다. 일본 최고의 타이틀 명인전에서 당대 최고 기사 중에 한 명인 사카다 九단은 23세의 약관 임해봉에게 도전장을 받는다. 사카다 九단은 호기롭게 외쳤다.
“20대 명인 따윈 없다.”
그러나 결과는 4연패후 타이틀을 임해봉에게 넘기는 비극(!)으로 끝이 났다. 쓸쓸히 대국장을 떠나는 사카다 九단에게 기자들이 물었다.
“패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패배한 거장이 대답한다.
“바둑은 슬픈 드라마야.”
사카다 에이오 九단. 명인 2회, 본인방 7회를 포함해 통산 64회 우승을 한, 바둑 역사상 최강의 기사 중 한 명이다. 조치훈 九단에 이은 2번째 타이틀 홀더 기록이기도 하다. 오청원, 후지사와 슈코와 함께 일본 바둑 전성기를 삼분할 했던 사카다 九단은 동시대의 후지사와 슈코와 함께 기인 기사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바둑을 두기에 앞서 양말, 윗옷, 바지를 서로 경쟁하듯 벗다가 급기야 팬티만 입은 채 후지사와 슈코와 치룬 대국은, 바둑 팬들 사이에선 소위 빤쓰(!) 대국으로 불리우며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그가 바둑의 기재를 넘어 호탕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한 시대를 풍미할 만한 그릇이었음을 알려주는 재미있는 일화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바둑을 배우기 시작해 10살에 일본기원 원생이 되었고, 15살에 입단했다. 승부가 이미 결정된 듯한 바둑에서도 결코 돌을 던지지 않았으며, ‘내가 실수를 했듯 상대도 실수를 할 순간을 기다린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누군가는 쓸데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쉽게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패배에 대한 인정은 미룰수록 좋은 것이었기에, 프로들 간의 대결에서 무려 20집이 넘는 차이로 끝까지 복기를 맞았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시간은 무심히도 흐르고 한 때 세상을 호령하던 최강자도 그 자리를 후배들에게 넘긴 채 내려와야만 한다. 그의 시대는 저물었고, 그것을 젊은 기사와의 대국에서 깨달은 거장은 ‘지나간 영광은 부질없을 뿐,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인생은 슬픈 드라마’라고 이야기했다.
주말 케이블 TV를 통해 다시 보게 된 영화 <타짜> 속 평경장의 대사는 면도날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던 한 인물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영화 속 내용도 그렇다. 최고의 실력을 지녔던 타짜였지만, 과거의 원한으로 한 쪽 손목이 잘린 채 기차에서 떨어져 죽는다. 스승의 죽음을 목격한 제자는 복수를 결심하고, 마침내 모든 이들을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그 끝에 설명할 수 없는 허무에 휩싸인다. 기차에 가방 끈이 걸린 채 매달리고, 열린 가방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의 죽음을 통해 얻게 된 지폐들이 꽃잎처럼 바람에 뿌려질 때, 주인공 고니는 아마도 스승의 이야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화투는 슬픈 드라마’라고 하는.
바둑도 슬픈 드라마이며, 나이 들며 사그러질 우리의 인생도 슬픈 드라마이다. 사카다 九단은 60여년 전의 그날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당대 최고의 기사였던 사카다 九단. 23세 약관의 임해봉에게 타이틀을 넘겨주고 떠나던 그의 모습은 영화<타짜> 속 명대사를 떠오르게 한다. ‘바둑(화투)은 슬픈 드라마야’